[대도시의 사랑법] 후기

레이디버드님의 후기 제목이 제게는 좀 흥미로웠습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인 흥수와 재희를 설명하는데 있어 흥수는 게이로, 재희는 "미친년"으로 통칭이 됩니다. (네이버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소개가 되어있군요) 왜 흥수는 "미친놈"으로 라벨링되지 않을까요? 흥수도 재희도 미친 청춘을 보내고 있는데 말이죠.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가장 큰 핵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명의 비정상성은 성정체성에, 다른 한명의 비정상성은 행실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아마 이 라벨링을 주류 집단의 편견이라고 본다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게 있습니다. 재 00라며? 으 더러워~ 하고 수군대는 그런 편견 말이죠.


소설을 원작으로 삼는 영화가 소설을 그대로 구현할 필요는 없습니다. 허나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첫번째 에피소드를 중점적으로 따온 이 영화를 보면서 원작보다 영화가 조금 더 일반적 시선에 호소를 하고 있다고는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원작 소설의 핵심은 일반 사람들이 인식하는 재희와 흥수의 (성) 생활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문란'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죠. 두 사람 다 성적 쾌락을 추구하며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이들은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원작은 왜 대체 최소 1년 단위의 연애를 꾸준히 하며 일종의 일부일처제를 연습해야하는가, 혹은 왜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 기준에 맞춰서 자기 욕망을 절제해야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인정투쟁처럼 들리는데, 주인공들은 그냥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기가 내키는대로 만나고 헤어지고 물고 빠는 그 삶의 방식을 왜 누군가가 굳이 긍정하거나 부정해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역으로 듭니다. 


제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낯설었던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의 각색이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남의 시선을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타인의 판단을 귀찮아할 뿐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은 종종 결백을 주장하는 듯한 뉘앙스를 뛰고 있습니다. 난 그럼 사람이 아냐, 우린 그런 사람들이 아냐, 라고 정상성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아마 이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재희가 임신중절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다가 도망쳐나오는 장면일 것입니다. 재희의 임신중절을 두고 산부인과에서 뭐라뭐라 훈수를 두는데, 거기서 자궁 모형을 들고 뛰쳐나오는 장면까지는 같지만 이후 재희는 슬퍼합니다. 자기가 왜 더럽고 이상한 여자로 이렇게 취급받아야하냐고요. 영화의 이런 부분에서 저는 어쩔 수 없는 자기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원작에 비해 참 심지가 약하다는 생각도 하긴 했습니다. 


물론 원작을 그대로 옮기면 그것을 자유분방하다기보다는 천하의 쓰레기처럼 봤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현재 2020년대 한국에서 20대 남녀가 이 남자 저 남자와 섹스를 즐기며 사는 것을 허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텍스트로 읽고 내면의 상상에서 그칠 때 몰라도, 화면 상으로 그런 설정들이 전개가 된다면 흥행에 지대한 타격을 입고 말 것입니다. (한국의 젊은 관객층이 얼마나 정조관념에 엄격한지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불륜 소재'라는 도마에 올랐다는 것을 상기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 속 흥수와 재희는 이 일반인들의 정조관념을 절대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쾌락은 원나잇에서 술과 파티로 대체됩니다. 여기서 20대 대학생들이 꿈꿀 화려한 대학라이프의 이미지들이 펼쳐집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불금과 불토를 원없이 즐기는 쌔끈한 남자여자들... 그렇지만 이들은 정체성의 문제로 그저 한없이 가까운 친구 사이입니다. 자신들의 성정체성이 가진 약점을 공유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욕망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해보이는지요. 


물론 이것은 쿨한 게이프렌드의 판타지를 어느 정도 차용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흥수가 날렵한 몸을 가진 패셔너블 게이가 아니면 이 영화는 아예 성립이 안됩니다. 그렇지만 상업영화니까, 또 캐스팅부터 엄청나게 난항을 겪은 영화니까 이런 타협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각자 부딪힌 사회적 편견에 대고 다른 톤으로 한마디씩 하긴 합니다. 제게 재희의 일침은 다소 뻔해보였고 오히려 흥수가 퀴어애인의 동아리부스 활동을 꺼려하는 게 더 흥미로웠습니다. 세상에는 엿같아하면서도 거기에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쿨하지 못한 모습,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묘하게 현실적이었다고 할까요. 


영화의 엔딩도 원작에 비해서 조금 가볍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수많은 세상 사람과 성적으로 엮이고 가볍게 헤어지면서, 오히려 하나의 애정관계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던 흥수가 재희마저 이성애자 유부녀로 떠나보내면서 냉장고의 냉동 블루베리를 보는 게 그의 서늘해진 마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희망적이어서 원작의 시원섭섭함이 좀 안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둘 다 미친놈 미친년으로 살았지만 그래도 미친년은 결혼을 하고 공인된 커플생활에 안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게이인 나는...? 이라고 묻는 질문을 영화가 생략해버린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퀴어 영화가 갈 길은 멀고 제작부터 개봉까지 꼴통들에게 엄청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이런 안전하고 상업적 영화조차도 하나의 진보적 발걸음으로 느껴지니 참 아쉽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영화 창작자들의 대범함보다는 오히려 자본과 문화산업의 마이웨이 정신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 흥수가 자신의 모친에게서 연민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 쓰셨듯이 그 제목은 이 작품 공식 시놉시스로도 쓰였고 아예 작중 나레이션으로 둘이 자기들을 스스로 그렇게 지칭하죠. 요점에 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원작을 읽진 않았고 첫번째 '재희'라는 챕터에서 재희 캐릭터의 비중을 늘렸다는 정도만 알고 봤어요.




      원작독자들의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는 감상평들을 읽으면서 대충 어떤 식으로 각색이 이루어졌는지 짐작은 했습니다. 박상영 작가도 집필 과정에서 피드백을 줬다는데 '상업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이렇게 각본을 쓰는구나 했다네요. 흥수 역할 캐스팅은 제 글에도 썼지만 유명 남배우들이 죄다 몸을 사려서 신인급까지 기회가 내려간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런 몸 좋은 패셔너블한 게이도 상업성을 고려한 변경이었겠죠. 그래서 캐릭터 이름도 바꿨을거구요.




      겨우 이정도로 싶지만 같은 시기에 나온 드라마 예고편만 가지고 벌써 그 단체에게 항의를 받는 나라에서 슬프지만 이정도만해도 큰 한걸음을 딛은거라고 보는게 맞긴 맞고 드라마도 넷플에 있으니 곧 봐보려구요.

      • 그러게요. 어떤 현실은 소설을 영화로 장르전환을 할 때 훨씬 더 안전하고 뭉툭한 판타지로 바꿔놓게 하는 게 좀 안타깝습니다. 그 아쉬움에도 저는 이 영화가 나름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흥수가 얼굴에 상처입고 돌아와서 서로 막 싸우다가 누가 이렇게 했냐고 서로 열불내고 걱정하는 장면은 원작에서 생각하기 어려웠었어서 좀 단짠맛 재미가 있었습니다 ㅎㅎ

        • 재희가 막판에 당하는 데이트 폭력도 현실에선 저렇게 좋게 마무리 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아니까 마음에 좀 걸리더라구요. 이후 경찰서에서 화해, 커밍아웃이 작위적이고 오그라든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전 오히려 그건 좋았어요. 귀엽기도 했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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