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의 책들.

2023년부터 한 해의 책을 모아서, 다 모이면 적당한 시간에 토너먼트를 시켜서 그 해의 책을 뽑아보고 있는데, 방금 2025년의 결과를 뽑아봤습니다. 이런건 대전 운도 중요하긴 하겠지만, 반은 재미로 반은 돌아보려는 마음으로 뽑는 거니까요. 올 해는 72권의 책을 (만화책도 가끔 포함, 한 질을 한 권으로 침) 읽었더군요. 사실 접하는 책보다 읽는 책이 훨씬 적어서 매 번 이런걸 집계할 때는 부끄러움이 같이 따라들어옵니다. 게다가 읽은 책들 대부분은 혼자 힘으로 읽은건 아니고,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 분들과 함께 읽기에 읽어낸 것이기에 뭐랄까 더욱이요.


돌아보니 2023년에는 [암컷들]을, 2024년에는 [헌치백]을 뽑았더군요. 2025년은 대충, 이 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책이 있었는데, 돌아보면서 정리하니 새로운 책이 왕좌에 올랐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기에 재미가 있는 것이겠죠. [살릴 수 있던 여자들]이란 책인데, 가정 폭력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한 논픽션입니다. 문제를 다루는 많은 책들은, 문제의 크기와 깊이, 뾰족함 같은 것을 휙 던저놓고 쓰윽 사라지거나 주례사적인 해결책만 제시해서 마음에 구멍 하나 더 남는 식인데, 이 책에서는 실무에서 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실질적으로 어떤 일들의 개선에 나아가는 지점들이 와닿아서 좋았습니다. 우리가 사회적 문제를 앞에 두고 실질적으로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구체상을 보게 되어 마음이 풀리는 지점이 있었느데요, 그와 함께 끈적하고 답답한 현실도 더 딥하게 알 수 밖에 없기도 하더군요. 1장과 2장이 너무 괴로우면 3장으로 바로 건너 뛰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의도대로 폭력의 3주체라고 할까, 각 장을 모두 모아서 전체가 스케치되는 것이기에 묵묵하게 읽는게 저는 좋았습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부분들이 많이 도입되었으면 싶군요.


결승에 올랐던 다른 책은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될 것이란걸, 제발 전해주세요.]와 [가까스로-있음]이었네요. 전자는 르완다 대학살을 르포식으로, 당사자들에게 인터뷰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국내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내전 상황을 걱정하며 고른 책 중 하나였는데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라는 깊은 긍정적 체념을 느낀 책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을 별로 믿지 않을 뿐더러,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라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이니까 그랬구나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인간이라는 것에 저도 포함되고, 누구든 인간으로서 어떤 일을 저지르도록 하는 힘을 받으며 잠깐 사이에도 그 방향으로 튀어나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노력은 해보려고, 오류감각을 민감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어쩔 수 없을 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그래도 한국은 다행히 어느 정도는 급격한 내전의 암시에서는 꽤 벗어난 것 같아서 숨을 고르게 됩니다.


다른 분과 이야기 나누다가 철학이란게 구태의연하고 철지난 것이란 이미지라는 걸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 철학이란 신선하고 새로운 것, 이상하고 흥미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확실히 그럴만 하다고 납득이 되긴 하더군요. 한병철의 어떤 책에서, 현대 철학은 현대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런 철학들은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비슷하게 단언을 하는데 확실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란 생각을 합니다. [가까스로-있음]은 김홍중이란 사회학자의 신작인데, 사실은 철학책이란 생각을 합니다. 일종의 주석서인데, 프랑스 사회학자인 브뤼노 라튀르의 철학을 설명합니다. 이 철학(?)책 - 아마 사회학 책으로 분류될 것 같지만 - 마음에 크게 와닿았던건 지금 직면한 문제와 정면 추돌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파국의 시대에 살고 있고, 그렇다면 그런 시대에 가져야할 마음가짐이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를 나름대로 잘 써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헌해 마지막 책으로 읽었는데 좋았습니다.


순위와 상관 없이 돌아보며 아, 이런 책 좋았지 싶었던 것들을 보면... [나를 보내지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탄핵정국 정신의 지지대가 되어줘서 기억에 너무 남았구요. [극해]도 올 해 겨울에 읽는데, 이렇게 노력하면서 쓰는 작가가 있구나 했습니다. [오리들]이란 만화도 잊혀지지 않는데, 캐나다의 어떤 삶에 대한 구체성이 너무 탁월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만에 책 관련 글을 썼는데, 내년에는 좀 더 많이 읽고 싶군요. 벌써 1일이 아니라 2일입니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는데 올 한해도 정신 바짝차리고 꼼꼼하게 느끼는 해가 되었으면 싶습니다.

    • 오랜만에 책 소개 글, 잘 읽었습니다!


      저보다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헤아려 보니 오십 몇 권입니다. 상하도 있어서 대략. 거의 문학인데 25년엔 더 편향되었던 거 같아요.  


      [암컷들]은 정말 저도 잘 읽은 책입니다. 막연하게가 아니고 과학적 증거로 생각을 뒤집어 보게 하는 책이었어요. 


      [헌치백],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모두 살펴만 본 책이네요. 현실을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 보는 책은 어쩐지 좀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좋은 책을 그냥 보내곤 하는 거 같아요. 


      김홍중의 책은 [마음의 사회학], [은둔기계]를 샀는데 앞의 책은 조금 읽다가 꽂혀 있는 신세입니다. [은둔기계]는 단상의 묶음인데 시와 산문의 중간 쯤이라고나 할지요, 쉬운 글은 아니었어요.. 조금은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일기와도 비슷했습니다. 이분은 사회학자인데 문장은 문학적으로 느껴져요. 그런데 그 둘이 결합하자 어려웠습니다. 사회학적 지식을 쉽게 풀어 쓰기보다는 그것을 문학적인 은유와 상징을 활용해 전달하는 느낌입니다. 제가 한 권은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조금 읽다가 어려워서 뒀기 때문에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여튼 어려웠고, 이후로 다른 책은 좀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는 가즈오 이시구로 책 말씀인가요? 참 좋지요. 이 책 이후로 비슷한 책과 영화를 봤지만 이만큼 아프게 마음에 남는 책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극해], [오리들] 두 권은 찜해야겠어요. 


      시사인에서 출판인과 서점인들에게 25년의 책 조사한 기사가 최근 올라와서 봤는데 모르는 책이 많았습니다. 저는 당장 화제가 되는 책보다 묵혔다가 읽는 경향이 있는데 조금 빨리 따라가야 할 책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잘 안 되네요. 그냥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채로 좁은 생각 속을 맴도는 거 같습니다. 시사인 기사는 저는 참조하고 싶었는데 혹시 보실까 해서 남겨 봅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040

      • thoma 님은 대부분 혼자 읽으신 거죠? 책은 당연히 혼자 읽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같이 읽는게 버릇이 되는 기간인듯 싶습니다. 당연히도 읽는게 재미있으니까 그렇지만 같이 읽고 떠드는 것을 더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도 해요. 




        [암컷들] 좋았죠. 지금까지보다 앞으로의 발전도 기대가 되는 책이었어요. 현실을 세밀히 들여다 보는 책, 저는 사람들이 그런 것에 불편감을 크게 느낀다는데 둔감한 편인듯 싶습니다. 피로하고 괴롭지만, 세계에 여전히 있는 일들이라는 편이라서 그런가, 구체적으로 알지 않아도 괴로우니 그냥 더 알자는 편이여서 그런지. 보지 않으면 하지도 못할테니 올 해도 계속 찾아볼 것 같아요.




        저는 김중 입문(?)을 [은둔기계]로 했습니다. 너무 재미나게 읽었고, 그래서 [마음의 사회학]도 찾아 빌렸는데, 은둔기계 때 생각했던 것보다 책이 꽉 짜여있지 않아서 실망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나온 [세계에 대한 믿음]도 가져다 놓았는데 영화평집이라 영화를 안 보고 읽어도 되나 고심중입니다. 아포리즘 장르 자체가 제 취향인 것 같기도 하고요. 




        [나를 보내지 마]는 다 읽고 나서는 아주 좋진 않았는데, 독모 이후에, 그리고 이런 것 저런 것 이후에 더 좋아지네요. 사실 이제 책 원 내용과는 멀어진 감상일 수도 있어요. 저는 영화는 안 보고 영화 광고 클립 하나만 봤는데... 영화를 보고 싶지 않고 영화 클립 그 자체가 전하는 정서가 훨씬 강렬하더라구요. 그래서 더 남고 있을지도. (약간... 잘 아는 사람의 홈 비디오를 본 기분.) [극해]는 깔끔하면서도 투박한 면이 있는데 어떠실지, [오리들]은 또 어떻게 보실지...




        기사는 쭉 봤습니다. ㅋㅋ 저는 화제가 되는 책을 읽는 사람보다 처음 들어본 책들을 읽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더라고요 ㅋㅋ 저는요.

    • 철학의 이미지가 그렇게 된 건 꽤 오래된 일인 것 같아요. 일단 철학자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사람들이 다 아주 옛날 사람들이다 보니... ㅋㅋ 그나마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세기말엔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하구요. 어찌보면 인문학의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철학이라 생각하는데, 아시다시피 인문학이란 것도 요즘 사정이... orz

      • 어떤 책에서 유럽 지식인들의 몰락에 대해 다룬 한 장이 있었는데, 갈수록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뭔 말을 하든 신경도 안 쓰는 시대로의 이전을 다뤘었죠. 이 시대에 네임드? 철학자가 씨가 마른게 꼭 특정 나라만의 일이 아닌거구나 싶었는데요. 이 시대의 철학자, 강신주... 아니고 왜인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침착맨이군요. '롯스럽다' 같은 말을 만드는 현 시대의. 저는 그 말씀하신 인문'학' 쪽은 크게 걱정은 안 되어요. 아카데믹이라고 해야 할까? 그 쪽 계열은 항상 그래왔던거고, 광의의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대 구간은 삶에서 분리가 불가능한 영역이니까 앞으로도 걱정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 책 소개 글 감사합니다. 읽지 않고 사서 방치하는 책이 많아지고 있긴 한데, 그래도 책 욕심이 있어서 이전 베스트인 '암컷들'이나 '헌치백'은 구입하려고 합니다.(올해 베스트인 '살릴 수 있던'은 너무 무거운 주제라 다음 기회에;;;;) 위에 시사인 기사에 책방에서 추천한 책 중에 '죽은 다음'도 아주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구입만 하는 책이 늘어가는군요. 은퇴까지 7년 남았는데 은퇴하면 읽겠다는 핑계를 대 봅니다. 

      • 아- 빨리(?) 은퇴해서 책만 읽고 싶군요. (그럴 수 있을지 조차 모르지만.) 언제 방치하시고 계신 도서 목록을 한 번 공유해주시죠 ㅋㅋ. 그냥 남의 서재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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