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있음] 시라트
작년 말, 건강검진 결과가 애인을 조금이나마 걷게 만들어서 데이트의 형태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목적지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지 않고, 좀 멀찍하지만 주차하기 편한 곳에 세운 후에 상당히 긴 거리를 걸어가는 방식으로요. 어쩔 때는 공연장에 꽤 먼저 도착해서 주변의 공원을 몇 바퀴 돌기도 합니다. 그에 힘입어 저도, 회사에서 가까운 거리의 정류장이 아닌 먼거리의 정류장까지 좀 더 걷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날이 더 추워져서 그리고 운동 겸사겸사 걷지 말고 뛰어볼까? 생각하고 퇴근 엘레베이터 앞에서 부터 오랜만에 뛸껄 생각하니 마음이 두근(?)거려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렸습니다. 그도 그럴께, 먼 거리의 버스 정류장의 버스 배차 간격이 좁아서 조금만 더 빨리 도착하면 15분 정도 일찍 탈 수 있었거든요. 1층에서 내려 길가를 뛰기 시작하는데, 40초도 뛰지 않아 몸이 날아가 1자로 보도블록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잠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6시 이전에 해가 져서 인도가 꽤 어둑어둑했고, 막 퇴근길이 시작되어서 어두운 인도와 비견되게 차도에는 차들이 많았습니다. 일어나서 느리게 걸어가는데 보니, 큰 나무의 뿌리가 보도블럭을 밀어내어 살짝 울퉁불퉁하더군요. 두 발이 공중에 떠 있을 때 그 중 한 발의 발끝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두 무릎은 피멍이 들어 있었고. 그런데 이후 찬찬히 생각해보니 정말 여러가지로 다행이었습니다. 일단 엘레베이터에서 손에 가죽 장갑을 꼈거든요. 넘어지는 그 찰라 두 손바닥을 얼굴 양 옆으로 엎드려 밀려서 장갑 바닥이 완전 다 쓸렸더군요. 장갑을 안 꼈더라면... 아마 얼굴이 바닥에 제대로 부딛혔겠죠. 그리고 무릎도 다행히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부딛힌건 아니라서 골절까지는 일어나진 않았더군요. 오른쪽 어깨의 기동범위가 처음에는 줄었지만 이제는 거의 원복이 되었습니다.
보통 자전거로 출퇴근할 때,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언제나 어처구니 없이 허망하게 죽을 수 있고 그건 정말 순식간일꺼야. 더 헛된 상상으로는 고층 아파트에서 자다가 순간이동(?)을 깨달아 잠결에 한 3m 정도 수평 이동을 하는 상상입니다. 많은 순간이동자들이 그렇게 죽었을꺼야, 같은. 지진으로 인해 아파트가 무너지는 상상도 가끔 합니다. 목숨이란 아무래도 순식간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이걸로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 있겠지만, 저는 제가 이런 생각을 함으로서 제반사항은 변하지 않지만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저라도 그냥 뛰다가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단건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화를 본 이후 잠깐 이 일이 떠오르더군요.
시라트를 보기 전에, 이 영화가 특이하다는 입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입소문과 함께 레이브 파티라는 소재, 거대한 문 사이에 서 있는 한 남자 그림의 포스터를 보게 됩니다. 제목은 종교적 의미라고 하고. 그러니까 아마... 레이브 파티에서 어떤 기묘한 의식이 성공해서 다들 예상도 못한 종교적 현상이 실체화 되는 걸까? 초반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현상들에 사막에서 사람들이 당황하다가, 어떤 존재와 상황을 추론해서 CG스러운 적들에서 빠져 나오던가 빠져 나오지 못 하던가 하는건가? 그 종교적 현상은 기독교적이 아니라 타교도일수도 있겠군... 하고 갔는데 웬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건 [서브스텐스]급 충격! 이라거나, 한국어 포스터의 심판 어쩌고 하는 걸 안 본 것입니다. 다시 찾아보니 문!이 아니라 스피커!였네요!)
루이스는 레이브 파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종교적(?) 흥취의 외부자입니다. 그리고 이 레이브 파티 사람들은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거대한 정치/군사적(?) 갈등의 외부자입니다. 둘 다 각자의 목적지를 가지고 연료를 사서 운전대를 잡아 자의적으로 이동하는 외부자였지만, 결국에는 레일 위에서 함께하는 내부자가 됩니다. 큰 틀을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영화의 처음은, 쌓아올려지는 스피커들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손도 안 보여요. 그러다 서서히 손이 보이고, 인간이 스피커를 쌓는게 보이고. 짜잔! 거대한 스피커 벽! 그리고 반향 해주는 바위벽이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위에서 생각했던 CG로움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스피커구나. 그리고 현실에 딱 달라붙어있지 어떤 몽상적 체험은 없겠구나, 하지만 혹시? 하는 마음으로 봤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던, 항정신성 약품에 취해 현실 감각 외의 세상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예 안 나온다는게 놀라웠고 그게 특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레이브 파티도 군인들에 의해 잘라내버리고, 두 번째 레이브 파티도 마찬가지로 몰입 이후까지 나아가지 않고 잘라버립니다. 그 이외의 장면 전환에 있어서도 반복되는 리듬이 토막내듯 정적으로 잘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영화 중간에서 반환점을 도는 그 사태 때도, 타이어가 헛도는 문제를 해결하는 카타르시스 직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종교적이나 심원적이라기보다는 현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비유라기보단 영화 내내 눈에 보였던 사실들 그 자체요. 어떤 상황에 대한 외부자로서 자신의 문제와 목표에만 집중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크게 보면 외부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산을 타는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사라진 반군 기지에서 기름을 보충할 수 있었던 이유, 최후의 레이브 파티에서 일어났던 일들, 이런 것은 결국 우리는 모두 내부인이란 것이겠죠. 이렇게 안온하게 앉아서 스피커 벽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될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 쯤의 강아지를 안아들고 사막을 걷는 두 사람의 롱테이크 샷이었습니다. 또로로로롱- 하는 소리와 그 둘은 눈을 감고 걷기 시작하는데, 이미 그 전의 사람이 또로로로롱- 하는 소리나 클로즈 업 샷이 전혀 안전하지 않다는걸 보여줬는데, 그들이 계속 앞으로 걷는데, ... 영화관의 누군가가 위에서부터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 출구 쪽으로 걸어내려갔습니다. 단을 이루고 있는 관객석 옆을 한 단 한 단 앞으로 내려가면서요. 그 때 저는 이상한 논리지만, 그 관객이 갑자기 폭사할까봐 손에 땀을 쥐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관객도 스크린 안의 두 사람도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관객이 좀 더 빨리요. 정말 기묘한 일이었습니다.
그 지뢰밭을 건너서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샷이 한 번 있는데, 그것이 정말 인상 깊더군요. 그 많은 재난이 한 컷에 다 보입니다.
P. S. 영화는 시간 순으로 나아가는데 두 컷 정도가 시간보다 더 먼저 튀어 나옵니다. 맨 발로 사막을 밟는 최후의 레이브 파티 장면의 일부가 훨씬 이전에 나오고, 기차 맨 앞에서 레일을 보며 찍었을 장면이 도로의 흰 색 선이 깜빡이는 장면과 함께 나옵니다. 음향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몽상적인 편집 아닌가 싶습니다. 왜 그 두 장면이어야 했을까, 생각 나는게 있지만 정확하진 않네요. (외부자에서 내부자로 병합되는 장면?)
P. S. 2.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난리 판국에서 한국인들은 아직까지는 그래도 꽤나 안온하게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글쎄... 혹은 미디어가 표현하는 것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고요. 영화를 보며 [시빌워: 분열의 시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들 비슷한걸 느끼고 있는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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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헤드라인 중 가장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사입니다.
'이란은 지금 5.18 입니다.'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ly9qw6y0dvo
인터뷰 내용 중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 눈물이 나더군요. (청바지 입던 시대가 모든 이란인들에게 적용되는건 아니었고, 수도권의 돈 있는 분들이 그렇게 살 수 있었다는 복잡한 사실들은 일단 뒤로 하고서라도.) 이 영화를 보고 죄와 벌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고, 이 시대에 개인으로서 기차 위에 함께 탄다는건 무엇일까 좀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평론가들의 호평만 믿고 보기 시작했는데 레이브가 끝나는 시점부터 언제 위기가 닥칠지 계속 긴장하면서 봤습니다. 직업 배우가 아닌 특이한 주변인을 섭외한 캐스팅 덕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누가 희생자가 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고요. 영화에서 암시하듯 세계 전체가 한순간에 종말을 맞을 수 있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싶은 무력감과 그래도 사막에서 물 한 병 나눠 마시는 사람들이 중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더라고요.
극 중 이름과 실제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사막을 헤메다 바닥에 누워있는 루이스를 둘러싼 사람들 모습이 떠오르며 눈이 찔끔하네요. 영화에서 반복해서 변주하는 화면들, 차량이 한 화면에서 나아가는 장면도 비슷한 느낌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뒷부분의 포커스 나간 시커먼 물체들이 전조등을 치켜뜨고 알 수 없는 어디론가를 향해 가는 장면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