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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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  2025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테야나 테일러, 체이스 인피니티, 베네치오 델 토로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인간의 집착과 광기를 탐구해 왔습니다. 석유왕이 되고 싶었던 사내, 사이비 교주의 그늘 아래 부서진 남자...
이번엔 혁명을 꿈꿨으나 어느새 어정쩡한 중년이 되어버린 남자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영화는 PTA 감독의 가장 박진감 넘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친절한 설명 대신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건들을 늘어놓습니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는' 이 구조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듯한 압박감을 줍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야심과 신념이 부딪히고, 록조가 다니엘 플레인뷰를 연상시키는 압도적인 에너지로 화면을 장악합니다. 
퍼피디아는 일라이 선데이처럼 겁없이 록조에게 덤벼들지만 번번이 굴복당하고, 어설픈 봉기에 실패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동료를 밀고하고 아웃됩니다. 

중반 이후, 밥에게 16년 만에 혁명단체에서 연락이 오는 장면부터 영화는 톤을 바꿉니다. 
과거의 거창했던 이데올로기가 시간이 흘러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낡은 것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이 대목부터, 영화에서 밥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놓고 코미디의 길을 걷습니다. 
한때 체제전복을 꿈꾸며 불타올랐던 에너지는 16년의 세월 앞에서 연기처럼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엔 사춘기 딸 걱정으로 우왕좌왕하는 아저씨의 슬랩스틱만 남아 있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식의 건조하고 무자비한 추격극으로 다시 변화됩니다. 
록조는 안톤 쉬거처럼 자신만의 논리로 움직이는 불가해한 힘이 되고, 윌라는 르웰린 모스처럼 그 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감하면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밥은 에드 톰 벨 보안관처럼 무력함과 책임을 동시에 짊어지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지만, 실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종반부의 카체이스 장면은 가장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확 트인 사막을 오르내리며 가로지르는 도로 위의 추격전은 롱테이크와 와이드 앵글을 활용해 조용하면서도 긴박감이 넘치고, 조니 그린우드의 불협화음 섞인 비트가 더해지면서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 시각화된 명장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마치 밀실에 갇힌 듯한 폐쇄 공포를 유발하는 연출력은 그가 왜 이 시대의 거장인지 알려줍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꽃미남을 벗어난 이후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입니다. 
어정쩡한 혁명가를 꿈꿨다가 16년이 지나 어정쩡한 중년이 된 밥이, 오직 딸을 지키기 위해 비효율적이고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은 눈물겨운 동시에 폭소를 자아냅니다. 
고갈되어버린 퍼비디아의 혁명 에너지와 대조적으로, 딸을 지켜야 한다는 지극히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이유가 밥에게 이 무모한 싸움을 멈출 수 없게 합니다. 

숀 펜이 연기한 록조는 잘못된 신념에 경도되어 주위를 위협하는, 악당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인물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고, 자신은 그 논리에 충실할 뿐입니다. 안톤 쉬거가 동전을 던지며 운명을 말했다면, 록조는 아예 동전을 쥐고 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같은 상급의 악당 앞에선 무기력한 면모가 [블랙 클랜스 맨]을 떠올리게 합니다. 진지한 이념이 우스꽝스러운 코스튬에 박제된 듯한 묘한 불편함이 느껴지죠.

테야나 테일러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초반의 야생적이고 맹목적인 자유분방함은 관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지만, 거대한 시스템과 반복되는 폭력의 연쇄 속에서 에너지가 소진되고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퍼비디아의 모습은 인간들의 나약한 민낯을 드러냅니다.

조연이지만 존재감을 뽐내는 베네치오 델 토로는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무게중심을 잡습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이민자들을 돕고 지혜롭게 위험을 관리하는 그의 '센세' 역할은, 영화의 소란스러움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등불 같습니다. 

체이스 인피니티는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영화의 질감이 바뀌는 느낌입니다. 올해의 신인 배우로 뽑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윌라 캐릭터의 활용도가 기대보다 기능적으로 소모된 느낌이 있어, 조금 더 입체적인 서사를 부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촘촘하게 짜인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는 다소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장엄함에 매료되었던 관객이라면, 후반부의 노골적인 코미디와 추격전으로의 전환이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두 장르의 결합이 워낙 이질적이라 서사의 유기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도 다분합니다. 
특히 밥의 각성이 너무 급작스럽게 코미디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지점은 관객에 따라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밥이 딸을 위해  '어정쩡한' 투쟁을 계속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남습니다. 
혁명의 대의는 진즉에 사라졌지만, 가장 사적인 이유로 그는 싸움을 계속합니다. 혁명은 끝났지만, 아버지의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자유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란 센세의 말처럼, 영화는 윌라가 두려움 없이 시위현장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구시대 혁명가들의 백일몽이 헛되지 않았다는 위안을 보냅니다.

    • 퍼피디아가 내 거기는 혁명을 위한 거라고 큰소리치고 혁명 선언을 당당하게 외치고 총쏘고 토니 몬타나같다고 외치고 은행 털다 같은 흑인 경비원을 쏘아 죽이고 산후우울증 걸려서도 여성의 자율 어쩌고 하는 걸 보니 큰 구호 속에 자신의 욕망을 숨기는 비겁한 사람이라 봐서 나중에 편지가 나와도 별로 믿음이 안 갔어요. 그 시대 흔히 분위기에 휩쓸린 인물같았어요. 룩조도  거창한 구호와 거대한 집단에 소속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퍼피디아와 비슷하고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서 모여서 세인트 닉 만세 외치고 시작하는 거나 딸이 잡혀 간 퍼거슨에게 계속 암호 물어 보는 혁명가 집단 보면 스타일만 남고 알맹이는 사라진 게 퍼피디아같은 인물들이 머무르다 사라진 조직답고요. 토니 몬타나가 어떤 경위로 그런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생각 안 하고 총을 쥐고 있는 이미지에만 경도된 게 퍼피디아같았어요.






      베니시오 델 토로도 한편으로는 타자화되고 이상화된 라틴 아메리카 인이란 생각이 들었죠.

      저는 체스티디 이 배우도 사람들이 늘어놓는 것만큼의 대단한 인상은 못 받았습니다. 호화 배역진 사이에서 충실히 자기 역할은 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거지만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연기는 아니었어요.쓰신 대로 기능적으로 쓰여진 탓도 있겠죠.


      개봉했을 때 이 영화 안 보고 가을야구 봤는데 그게 잘 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번 재개봉 때 정가 다 주고 본 게 아깝지는 않지만 기대보다는 별로였네요 채스티디 인피니티도 감독 지시 안에서 잘 움직엽다고 생각하는 정도.




      한 사람이 외치는 구호나 속한 단체의 강령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본질임을 느끼게 해 주긴 했습니다. 원래 샬린이었는데 숨어 살며 받게 된 윌라란 이름이 의지 will에서 오는 거 볼 때 혁명의 의지는 대대로 이어진다는 거겠죠, 제옥처럼 끝없는 전쟁.




      위장명이나 별명없는 두 인물이 퍼피디아와 디안드라인데 퍼피디아는 위에서 썼고 디안드라는 용감한.


      강한이란 뜻이 있고 그 이름대로 행동해요.




      아버지가 일당백하는 테이큰을 뒤집은 영화같기도 해요



      • 킬러와 쫓고 쫓기는 후반부는 [터미네이터]에서 보호자가 무능력해진 열화 버전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 그렇게도 보이네요.

          윌라 폰을 알려주는 친구가 트젠인 것도 전복을 시도한 것 같았어요. 별나게 they 이러고 다니지만 퍼피디아같은 배신자라는 듯.

        • On your feet,soldier라고 외치는 대사에서 사라 코너의 또다른 자아가 생겼다고 린다 해밀턴이 설명했는데 하루 사이에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윌라에게는 맞네요.
    • 참 재밌을 것 같다... 라고 생각만 하면서 그냥 흘려 보냈던 작품인데 이런 후기 글들을 보면 좀 후회가 되기도 하구요. ㅋㅋ


      이 감독님 영화들이 하나 같이 다 좀 강렬하게 밀어 붙이는, 보는 사람 힘 빠지게 만드는 그런 에너지 같은 게 있고 그랬는데 이번엔 아예 액션 비중을 키워가며 그런 체감을 더 강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역시나 극장에서 봤어야... 라는 때늦은 후회를 해 보구요.




      언제나처럼 글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집구석에서라도 꼭 최대한 좋은 환경에서 봐야겠다고 다짐을 해 보아요. 하하;

      • 상영시간 2시간 41분에 약간 겁을 먹었는데 시간이 후루룩 지나가긴 합니다.


        아카데미 시즌을 맞아 OTT에 풀리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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