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늦게 태어났다는 것


  1.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출근을 안하고 돈을 벌 수 있다고? 방구석에서 영화 감독이 될 수 있다고? 이젠 다 현실이죠. 인류의 역사를 역사책에 비유하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점은 수천 페이지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 한 페이지에 불과하단 말이예요.


 오래 전에 피라미드 건설현장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일하던 사람은 이런 세상이 올 줄 알았을까? 목화밭에서 하루종일 강제노동을 해야 했던 흑인들은 이런 세상이 올 거라고 꿈이라도 꿨을까?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그들은 아이를 낳았단 말이죠. 바통을 넘겨주기 위해서요.


 

 2.그렇게 후손들이 이어지고 시간이 이어지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의 사람들은 다들 힘들게 살았는데 결국 그들이 역사의 수천 페이지에 걸쳐 간신히 만들어낸 과실은 내 차지가 되어버렸어요. 이게 내것이어도 괜찮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것이죠.


 물론 나도 힘들게 살긴 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21세기에는 쓸 수 있는 커맨드가 엄청 많거든요. 물론 커맨드를 입력하려다가 삑살나면 즉시 인생이 나락가는 함정들도 많지만, 과거처럼 뭔가 발버둥쳐볼 구석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거죠.


 그야 나는 이런저런 좋은 선택들을 좋은 타이밍에 내렸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이건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일까진 아니예요. 아무런 선택지도 없었던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그런 통찰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을 거니까요. 나의 통찰력은 그저 거들 뿐이죠.


 

 3.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것들 중 가장 잘한 건 '늦게 태어난 것'이예요. 이 행성에서 늦게 태어나는 것만큼 큰 행운은 없다는 거죠. 물론 요즘 인간들은 불만이 많지만...흠 글쎄요. 예전에는 감히 불만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모가지가 날아갔잖아요? 불만에 절어 사는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심지어 그들은 불만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러고도 모가지가 멀쩡하죠. 불만을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늦게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 해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불평하는 것'을 하루종일 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요.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거예요. 불평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걸 가만히 관찰해 보고 있으면, 그들의 불평이 점점 디테일해지고 형이상학적인 영역까지 가곤 한다는 거죠.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는 순도 96%의 마약을 만드는 업자들을 비웃었어요. 96%의 마약은 최상급의 상품이지만 100%를 추구하는 월터 화이트가 보기엔 하잘것없는 수준이니까요. 요즘 점점 진화하는 불평쟁이들을 보고 있자면 순도 100%의 마약에 도전하는 월터 화이트를 보는 것 같단 말이죠. 


 

 4.휴.



 5.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현대에는 신분 상승의 수단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 말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통신 기술은 옛날 사람들이 보기엔 '통신 마법'이예요. 옛날 사람들은 카톡 한줄을 보내기 위해 믿을 만하고 숙련된 레인저를 고용해서 보내고, 답신을 몇 주 몇달씩 기다려야 했으니까요. 현대의 평민들이 딸깍질로 지구 반대편 사람에게 문자와 영상을 무제한으로 보내는 걸 생각하면...이건 마법 그 자체죠. 


 이런 마법이 아주 싼값에 보급되었는데 이 마법을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쓰는 대신 하루종일 불평하거나 누굴 욕하는 데 쓴다? 잘 이해가 안가요.


 그리고 유튜브에 가면 예전엔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었던 1티어급 거장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제발 공짜로 봐달라고 다투고 있어요.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들의 밑에서 15년 정도 허드렛일을 무료로 해준 다음에나 얻을 수 있었던-또는 없었던-가르침을 말이죠. 그런데 유튜브에 가서 그런 걸 보는 대신 헛된 선동영상이나 음모론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죠. 잘 이해가 안가요.



 6.어쨌든 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긴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스스로를 갈아내어 만든 과실이 있다는 거죠. 그 과실을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삼아도 되고 온전히 즐기기만 하며 살아도 돼요. 


 그러나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싫어요. 불평 불만을 말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은 그동안 갈아넣어진 인간들을 모욕하는 거거든요. 그저 늦게 태어난 것 말고는 한 게 없는 사람들이, 이 최첨단 기술을 본인들의 비참한 기분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인류의 역사에서 일찍 태어나고 싶어서 일찍 태어난 사람은 없단 말이죠. 순서를 고를 수만 있다면 누구나 나중에 태어나고 싶어할 걸요? 하지만 먼저 태어난 사람들은 그저 맨 첫줄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 되는 고통을 평생 느끼고 참으면서 여기까지 바통을 넘겨줬어요. 그 사람들의 희생을 위해서라도 최신 기술은 건설적인 일에만 써야 해요. 자신의 똥냄새를 멀리 퍼뜨리는 데 쓰면 안된다는 거죠.



 7.나는 요즘 자신감이 왜 그렇게 없냐는 말을 자주 들어요. 너 정도면 자신감이 더 있어도 되지 않냐고 말이죠.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여기까지 내가 올 수 있었던 건 그냥 내가 늦게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늦게 태어난 건 내 능력이 아니니까요. 그런 부분을 감안해 보면 내가 아무리 좋은 실적을 내더라도 자신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자각하곤 하죠. 내가 잘하는 거라고 해봤자, 늦게 태어났다는 이점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4번의 휴는  쉴 休자 인가요?  아휴.. 어휴.. 할 때의 한숨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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