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24년 최고의 블루 레이/4K UHD 블루 레이 스물한편

영어판에도 썼지만 2024년은 참 끔직하고 한심한 일들이 전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한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소중한 분들을 잃고, 커리어상으로도 여러 불편하고 속이 상하는 일들을 겪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었고,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에 비하면 과도하게 불평을 늘어놓을 상황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2024년은 영화 관람과 광학 디스크 수집에 관한 한 지난 10년 동안에 활성화의 최고점을 찍은 한 해였기도 합니다. 지난해에 모은 블루 레이와 4K UHD 블루 레이의 숫자는 그 전년도에 비해 43 퍼센트 증가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양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지난 한 해 동안에 엄청난 양의 유럽과 일본의 60-70년대 장르영화를 출시한 Radiance Films 를 위시하여, 새롭게 등장하여 컬렉터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레벨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회사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수준의 복원판-한정판 디스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니가 녹음용 블루 레이 생산을 중단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자, 블루레이와 광학미디어의 파멸을 고하는 지겨운 뉴스 사이클이 또 한바퀴 돌고 지나갔습니다만, 이제는 이런 뉴스들은 하도 많이 읽어서 근지럽지도 않습니다. 아니 긍까 댁들은 스트리밍으로 영화 보고 사시라고. 


우리 바깥분이 “넌 이제 (한국에서 일하는 몸이라면 불과 몇 년밖에 안 남았습니다만 여기는 미국이니까…) 교직 은퇴하면 뭐할거냐?” 라는 질문을 하실때면, “음 일단 플라스틱 랩도 안 뜯은 블루 레이들 부터 하나씩 ‘디스크깡’ 을 해서 보는 거부터 해야져.” 라고 응수하곤 합니다만, 이게 그냥 더이상 농지꺼리로 들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지 오래되었죠. 작년에 모아서 쌓여있는 거대 박스세트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부터라도 스트리밍은 절제하고 쌓여있는 블루 레이, 4K UHD 블루 레이부터 부지런히 관람해야 되겠다는 일종의 절박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이 리스트에 올라간 타이틀들은 그해 최고의 복원이라던가, 역사적이나 미적인 가치, 또는 평론가들에게 사랑받는 작품들, 이러한 일반적인 “좋은 영화” 기준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드리고요. 아주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금년에 나에게 발견, 재발견 그리고 예상을 뒤엎는 즐거움을 선사해 준 타이틀들을 우선적으로 모았습니다. 굉장히 많은 양의 후보 타이틀들이 있었던 탓도 있겠습니다만, 2월 9일에 올라간 (지난해보다 약간 늦었군요) 영어판 리스트에 비하면 내용이 여느해보다 약간 더 차이가 나는 듯 합니다. 언젠가는 영어판과 한국어판이 일치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어지는 그런 상황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겠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구독자분들을 의식하고 (예를 들자면 읽으시는 분들께서 내가 선고한 타이틀들을 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지 여부라던지) 이 리스트를 작성하지는 않습니다만, 알게 모르게 영어권 독자분들에게는 한국과 일본의 상대적으로 덜 잘 알려진 작품들을 권하게 된다던지 그런 지향성이 반영이 될 수도 있겠네요. Film Movement 의 이창동 감독 작품집 같은 경우는 한국어 리스트에 굳이 넣을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내가 손에 넣은 타이틀들을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한테 의미가 있어야 진입이 가능한 것이겠죠. 모르죠, 이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한국과 일본에서 출시된 타이틀들의 비중이 점차 커지는 방향으로 리스트가 변할 수도. 


작년에는 20위로 밀고 나갔는데 금년에는 21 개입니다. 예년에 비해서 4K UHD 의 비중이 소규모로 증가했는데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4K UHD 의 구매량의 비중도 마찬가지로 늘었고요), 앞으로의 구매 트렌드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 자 그러면 시작할까요. 


21. 심판자 The Double Crossers 鬼汁雙雄 (1976, Eureka!, Blu Ray- Region A)/ 20. 짝퉁유희: 가짜 이소룡 영화 컬렉션 The Game of Clones: Bruceploitation Collection (1974-1994, Severin, Blu Ray- Region Free). 


'25 DOUBLE CROSSERS BLU RAY COVER


21위는 20위와 페어링으로 간주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두 타이틀은 서로 기묘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일단 영화들의 예술적 가치때문에 리스트에 올라온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는 것은 가늠하실 수 있겠죠. 최근의 블루 레이를 내놓는 회사들이 좀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들게 만드는 과격하게 괴팍하고 컬트적인 출시 패턴을 보여주는 타이틀들은 이 둘 말고도 꽤 있습니다만, 이렇게 7-80년대 한국에서 이류 삼류 재개봉 극장에서 영화를 섭렵하다가 소공동 불법 복제 비데오테이프로 전환하게 되는 미디어 전승의 문화사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나같은 컬렉터에게는 일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흥을 가져다 주는 물건들은 별로 없었죠. [심판자] 는 신일룡 연기자가 주연하는 76년도 공개 한국-홍콩 합작 액션영화인데, 거짓말처럼 깨끗한 화질의 2K 복원판인데다가, 엥 이건 누가 봐도 70년대 한국 영화…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멀끔하냐? 또 자동차 폭주 스턴트 액션은 왜 이리 수준이 높은겨? 이런 식으로 연속적으로 골때리는 감정적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한편이고요. 아주 최근에 타계하신 신일룡 연기자님께서 의외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면서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비-무협영화적이고 도회적인 (요절한 일본의 액션 스타 마츠다 유우사쿠와 흡사한 종류의) 분위기를 띄워주는 것도 흥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연기자님께서 난데없이 [이소룡의 세번째 다리 지옥문을 뒤흔들다 (눈썹이 휙 하고 올라가실 분들을 위해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내가 의역한 제목 아닙니다. 원제에 충실한 옮김… 李三腳威震地獄門) The Dragon Lives Again] 라는, 갖은 말도 안되는 이소룡 짝퉁 무술영화중에서도 가장 극렬하게 헬렐레뽕인 괴작중의 괴작에 “대부” 라는 역할 이름의 갱스터 역할로 출연하십니다. 이 한편이 수록된 “가짜 이소룡 영화 컬렉션” 은 자그마치 열 세편 (보너스로 가짜 [당산대형] 속편 둘이 추가되어 실제로는 열 다섯편) 의 짝퉁 이소룡 영화들을 모아놓은 박스세트입니다. 쿵후영화의 광팬인 마이클 워스라는 분이 주도해서 모았는데, 장르 도큐계의 최고 권위자인 데이빗 그레고리가 감독한 [Enter the Clones of Bruce] (2023)— 이 도큐는 무척 잘 만들었고, 70년대 홍콩영화계의 흥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를 헤드라이너로 배치하고, 옛적 미국 TV 에서 심야에 돌려대던 더빙판 “쿵후영화” 의 추억을 간직한 올드 팬들에게 헌사한다는 방침으로 편집된 거의 백 페이지에 가까운 소 (늘 하는 얘긴데 백 페이지 되는 책은 보통 “소” 책자라고 부르지 않지 않나?) 책자가 첨부되어 있어요. 


'25 CLONES OF BRUCE LEE BOXSET- SEVERIN BLU RAY COVER 


참고삼아 [이소룡의 세번째 다리] 의 “내용” 은 사후의 이소룡이 염마대왕이 주재하는 지옥에 떨어져서 제임스 본드 (?), 드라큘라 (?!), 황야의 무법자 (?!?), 맹인 검객 자토이치 (?!?!) 등의 같이 지옥에 떨어진 빌런들의 행패를 응징한다는 스토리입니다. 몸에 백골 무늬를 그린 검은 타이츠를 뒤집어쓴 [가면 라이더] 등 특촬시리즈의 “전투원” 들까지 등장해요. 아무튼, 어떻게 이런 영화들을 긁어 모어서 나름 멋진 박스세트로 출시할 깡다구와 노하우를 지닐 수 있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인데요. 그런데 이 타이틀은 저 같은 매니아 웹사이트들의 2024년도 베스트 리스트에는 등장하는 빈도가 적었습니다만, 그 이유도 쉽게 유추가 가능합니다. 아마도 중국어 판본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이유가 가장 컸겠지만, 모든 작품들이 영어대사판으로 수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처럼 어느 정도까지는 옛 영화를 역사자료로 접근하거나, 될 수 있는 한 극장에 걸렸던 원본에 가까운 형태로 관람하고 싶은 분들께는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화질과 음질도 세버린 같은 회사에서 보통 내놓는 고퀄 박스세트의 기준으로 보면 한참 모자라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리스트의 사다리에서 미끄러져서 맨 밑에 턱걸이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컬렉션을 맨 정신으로 (ㅋㅋ) 내놓을 수 있는 회사는 세버린 뿐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습니다. 


19. 공포의 보수 La salarie de la peur (1953, The British Film Institute, 4K UHD Blu Ray/Blu Ray- Region Free). 


'25 WAGES OF FEAR 4K UHD COVER 


요번 리스트에서는 일부는 DVD 시절부터 내 오래된 리스트에서 이름을 볼 수 있었던 고전 명작들의 새로운 4K UHD 버전들의 비중이 예년에 비해 더 커진 듯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화 자체의 명성이나 예술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순위가 들쑥 날쑥한데, 사실 [공포의 보수] 는 화질이나 음질 상으로는 내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크라이테리언 블루레이에 비하여 그렇게 일취월장으로 뛰어난 업그레이드라고 볼 수는 없을 지 모릅니다만, BFI 에서 갖은 학문적인 특전을 부가해서 내놓은 새로운 판본이 역시 이 위대한 걸작에 부합하는 사양의 꼴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이건 그냥 혼자소리에 가까운 얘기인데, BFI 와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되는 4K UHD 에서 겹치는 타이틀이 요즘 꽤 많아지고 있습니다만, 리젼 코드에 상관없는 이 포맷에 있어서는 BFI 를 더 선호하게 되는 것 같네요. 특전이나 패키지의 차이보다는 뭐랄까? 크라이테리언의 연속적인 포맷 리부팅에 대한 약간의 지루함 같은 감정도 한몫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18. 더 키프 The Keep (1983, Vinegar Syndrome, 4K UHD Blu Ray/Blu Ray- Region A). 


'25 THE KEEP 4K UHD COVER


마이클 만이 한니발 렉터가 처음 영화에 등장하는 스릴러 [맨헌터] (1986) 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헐리웃의 A 리스트 감독으로 발돋움하기 직전에 내놓은 호러영화인데, 오랫동안 그저 그런 SD화질로밖에는 스트리밍할 수 없어서 팬들 사이에서는 원성이 자자했던 한편이죠. 극장 흥행에서도 실패했지만, 어쨌건 메이저 스튜디오의 이름을 걸고 와이드 릴리스가 되었었고 나도 필라델피아의 한 극장에서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흑인 도시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던 관객들의 반응은 “시큰둥” 이라는 표현으로 순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시에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던 나는 스티븐 킹을 위시한 미국 호러 소설을 영어로 탐독하고 있던 시절인지라, F. 폴 윌슨 (이분은 정치성향으로 보자면 리버타리언 우파입니다만, 필력은 좋은 분이고, 예상치 않게 여성 캐릭터의 묘사가 뛰어난 편입니다) 의 원작을 읽은 연후 상당한 기대치를 지니고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결과적으로는 여러모로 흥미는 있지만 데이빗 린치의 [듄] (여기에도 우연치 않게 독일 연기자 유르겐 프로흐노우가 출연하는군요) 과 비슷한 형태로 번안의 실패라는 판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한편이죠. 그래도 비네가 신드롬에서 프로덕션 스탭의 전면적인 참여하에 새롭게 4K UHD 로 내놓아준 것은 “역시!” 라고 반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17. 그것은 우주에서 왔다 It Came from Outer Space (1953, Universal, 4K UHD Blu Ray). 


'25 IT CAME FROM OUTER SPACE 4K UHD COVER


레이 브래드베리가 원작을 담당한, [축소인간]과 [우주 전쟁] 과 더불어 50년대 초-중반 미국 SF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잭 아놀드 감독의 고전입니다만, 유니버설에서 모처럼 4K UHD 로 복원하면서, 원판에서 의도했던 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3D 관람이 가능한 블루 레이를 추가했네요. 나는 사실 3D에는 별 관심이 없고, 뭔가 기똥찬 수준의 3D 관람을 해 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이런 특전에는 심드렁한 편입니다. 그렇더라도 막상 4K의 고해상도로 보는 [그것은 우주에서 왔다] 는 놀랍도록 표현주의적인 빛과 그림자의 아우러짐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사상적, 미적 공력을 과시합니다. 이미 DVD 나 블루 레이로 출시되었고, 심지어는 4K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작품들 중에서도 UHD 로 관상했을 때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더 뛰어난 작품들을 간혹 볼 수 있는데, 2024년에도 상당수의 타이틀들이 그런 일취월장하는 퀄리티를 과시했고 [그것은] 도 그 좋은 예시중의 하나입니다. 


16. 견신의 저주 犬神の悪霊 The Curse of the Dog God (1977, Mondo Macabro, Blu Ray- Region Free). 


'25 CURSE OF THE DOG GOD- BLU RAY COVER


견신 (이누가미) 이라는 존재는 딱히 그런 존재가 특정 종교나 지역을 통해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여러가지 형태로 일본 대중문화에 등장해 왔는데, 명탐정 킨다이치 코오스케 시리즈의 일환인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누가미가의 일족] (1972) 처럼 초자연적인 현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미스테리 작품 등에서도 타이틀에 쓰이고 있지요. [여자 죄수 701호 전갈] 연작으로 가장 유명한 토오에이의 장르 전문가 이토오 슌야 감독이 [엑소시스트] 의 히트로 말미암아 개나 고양이나 다 그 아류작을 만든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을 무렵에,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오컬트영화를 만들라!” (난 아직도 일본의 영화인들이 이런 식으로 구미영화를 레퍼런스 할 때는 구체적으로 뭘 지칭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스튜디오의 지령을 받고 오리지널 각본을 집필, 미에와 나라현의 광활한 삼림지대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해서 제작한 한편입니다. 심심하면 헐벗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고, 동물 애호협회에서 실제로 비난을 퍼부었을 정도로 과격한 개들에 관계된 묘사 (개떼들이 사람을 단체로 사냥해서 잡아먹는 시퀜스 뿐 아니라 산채로 개의 목을 베는 식신 [式神] 강림의 의식 등)들, 괴랄하게 일본식 괴담의 요소를 접붙이기한 한편입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호러 연출은 쓸데없이 효율적인 [엑소시스트] 빠꾸리 적인 시퀜스들과 [이누가미가의 일족] 등의 고딕 미스테리적인 요소까지 과격하게 마구 섞어놓은 괴작입니다만, 그 멘땅에 헤딩하는 막가파 정신에서는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독특한 플레이버의 괴작 전문 레이블 몬도 마카브로의 정신 (!) 에 합당한 출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15. 화성에서 온 마녀 Devil Girl from Mars (1954, Studio Canal, Blu Ray- Region B).

'25 DEVIL GIRL FROM MARS COVER & PACKAGE 


이 한편이 여지껏 기억에 남은 유일한 이유는 어린 시절에 사람 연기자들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커보이는 양철통으로 만든 조잡한 로보트를 무슨 특촬도감인가에서 봤던 경험때문입니다. 최근에야 이 한편이 영국내에서는 의외로 올드 팬들을 많이 거느린 나름의 유명세를 구가하고 있는 고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여전히 딱히 찾아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죠. 최근에 88필름스 등의 레벨에서 출시한 60-70년대 고전 영국 SF-호러를 지속적으로 구입했습니다만, 대부분이 고퀄의 리마스터버전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별 생각없이 구매한 [화성에서 온 마녀] 가 50년대 초반에 만들어졌다는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훌륭한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리스트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재발견” 이 아닐 수 없죠. 


패트리시아 라펀이 연기하는 화성 외계인 나이아가 한심스러운 코스튬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위엄과 존엄성을 갖춘 캐릭터라는 점, [나는 외계에서 온 괴물과 결혼했다] (이것도 전혀 나쁘지 않은 고전 SF) 등과는 반대로 남성을 손에 넣기 위해 여성들이 지구를 침략한다는 성정치적 배치의 역전 등, 시대상을 고려하거나 고려하지 않거나 상관치 않고 흥미있는 구석이 많습니다. 아, 물론 이 한편이 위에서 언급한 [그것은 우주에서 왔다] 같은 준수한 SF 에 비교해서 더 훌륭한 영화라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니까, 그렇게 받아들이시진 마시고요. 


14. 고지라 Godzilla (1953, Criterion Collection, 4K UHD Blu Ray). 


'25 GODZILLA 4K UHD


영어판에서는 [고지라 마이너스 원] 과 함께 더 상위에 랭크되었습니다만, 한국어판에서는 굳이 신작과 페어링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네요. 짧게만 한마디 해두자면 나는 [고지라] 의 4K UHD 판을 굳이 구입해야 된다는 절박함은 없었고, 거의 타성적으로— 20년 전에 이미 완전 절판된 국산판 디븨디부터 시작해서 최근 크라이테리언의 블루 레이에 이르기까지, 이소룡 영화의 박스 세트를 여덟개나 사 모은 것처럼 (4K UHD 는 안 살 겁니다. 이소룡 작품들의 화질이나 음질 개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요)— 새로운 판본이 나왔으니 구입한 것인데요. 확실한 것은, 이미 디븨디나 VHS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수한 화질과 음질로 개선이 된 블루 레이 판본보다도 더 한층 심도있는 암흑의 묘사와 더 한층 명료해진 사운드트랙을 를 비롯한 여러 요소에서 뚜렷한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2024년이야말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마침내 4K UHD 의 권위에 내가 굴복하게 된 해가 아닐까 싶네요. 


13. 론 스타 Lone Star (1996, Criterion Collection, 4K UHD Blu Ray). 


'25 LONE STAR 4K UHD COVER


이 한편은 극장에서 큰 감동을 받으면서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존 세일즈가 펄프 SF-호러 타이틀들에 일정수준의 퀄리티를 부여해주던 달필의 각본가로부터 [Matewan], 야구영화의 최고봉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Eight Man Out] 등의 각본-감독을 거쳐 미국 유수의 영화작가로 발돋움한 직후에 만든 한편인데, 세일즈의 경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2천년대 이후에 소설가-각본가-감독으로써 스페인계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쌓아나간 시발점에 해당합니다. 제목의 “론 스타” 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일단 미스테리 영화의 공식을 따라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텍사스와 멕시코의 두 세대에 걸친 얽히고 섥힌 역사를 크리스 쿠퍼와 엘리자베스 페냐가 연기하는 주인공들의 로맨스와 가족사를 통해 중후하게 풀어내는 일종의 웨스턴 사극입니다. 사상적으로 보나 드라마로 보나, 또 “현대사극” 으로 보나 정말 훌륭한 영화고, 지난 선거 이후로 망해가고 있는 천조국의 정치와 역사의식의 꼬라지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오게끔 만드는 한 편이죠. 


크라이테리언의 4K UHD 리마스터는 극장 관람의 경험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정도 수준까지는 가지 않습니다만, 제인 캠피언의 [피아노], [브리지트 존스의 일기] 등을 담당한 스튜어트 드라이버그 촬영감독이 담당한 영상미의 차분하고 절조있는 전체상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서플도 양적으로는 많지 않지만, 세일즈와 드라이버그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대적인 맥락에 적합한 방향으로 작품을 분석해주고 있습니다. 


12. 베이징산 수박 北京的西瓜 (1989, Kani Releasing, Blu Ray- Region A). 


'25 BEIJING WATERMELON BLU RAY COVER


크라이테리언에서 [하우스] 블루 레이를 내놓은지도 15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내가 영미권에서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최후의 일본 영화 거장이라고 규정했던 바 있는 오오바야시 노부히코감독의 작품들은 여전히 글로벌 광학디스크 시장에 제대로 반영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지난해의 Third Window카도카와 아이돌 영화 컬렉션의 갑작스러운 리젼 B 출시 덕택에, 마침내 오오바야시 작품들도 최소한 (훨씬 영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떨어진다고 나는 생각하는) 스즈키 세이준이나 후카사쿠 킨지 감독작품 정도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좀 부풀었습니다만, 아직껏 [폐시], [전교생], [이인 (異人) 들과의 여름] 등의 일본현대영화사를 논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명작들이 영미권에서 출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천안문사태와 관련지어 80년대 말 일본의 중국 유학생들과 한 야채가게집 주인 아저씨와의 (실화에 바탕을 둔) 유대와 교류, 우정을 그려낸 [북경산 수박] 이 갑자기 나타났군요. [북경산 수박]은 일본에서 20년도 더 전에 출시된 디븨디가 당시로서는 영어자막도 포함된 고퀄의 타이틀이었기 때문에 블루 레이로 업데이트 되어서 나와주기를 가장 고대하던 한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좋은 화질과 양질의 서플을 넣어서 내주니 고맙기 그지 없네요. 


레이블은 일본과 타이완 뿐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장르적이지 않으면서도 아트하우스적인 명성이 비교적 적은 “숨은 명작” 들을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카니 (일본어로 “게” 를 일컫는 그 카니인데, 카메라를 셋업하는 기구에서 유래했다고 하네요) 릴리싱인데, 향후 무척 기대되는 회사입니다. 빨리 망하지 않고 오래 버텨주었으면 합니다. 


11. 포효하는 20년대 The Roaring Twenties (1939, Criterion Collection, 4K UHD Blu Ray). 


'25 THE ROARING TWENTIES 4K UHD COVER


영어판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하워드 호크스 감독의 [스카페이스] 의 크라이테리언판이 더 강한 인상을 남기리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출시작들을 관람해보니, 영화사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좀 더 전형적인 “오락영화” 로 분류되곤 하는 라울 월쉬 감독의 [포효하는 20년대] 가 압도적으로 더 좋았습니다. [백열] 같은 전후의 걸작들에서 보여지는 광기를 번득이는 싸이코 갱스터가 아닌, 1차 세계대전의 전쟁 체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좀 더 서민적이고 입지적인 이미지의 “악당” 을 그려내는 제임스 캐그니와 샘 스페이드 등의 캐릭터로 하드 보일드 주인공의 대스타로 발돋움하기 이전의, [초록 물고기] 나 [쉬리] 에 출연하던 송강호 연기자 같은 수준의 배역을 담당한 험프리 보가트가 공연하는 한편이라는 데에서도 화제성을 담보하고 있죠. 그러나 실제 이 한편의 최고의 매력은 초고속 가속장치를 달고 질주하는 것 같은 레벨의 엄청난 마력과 민첩함을 과시하는 월쉬의 편집과 연출이 아닐까 싶습니다. 


10. 흡혈귀/흡혈귀의 관 El Vampiro: Two Bloodsucking Tales from Mexico (1957-58, Powerhouse Indicator, Blu Ray- Region Free). 


'25 EL VAMPIRO- INDICATOR BLU RAY COVER

전년에 이어서 인디케이터에서 아깝게 절판되고 레이블이 아예 없어지게 된 카사 네그라에서 출시된 적이 있는 전후 초기 호러영화들을 포함한 고전 멕시코 장르영화들을 계속 내놓고 있습니다만, 이 두 편은 크리스토퍼 리가 해머 드라큘라로 등장하기 이전에, 귀족적인 섹스어필을 전면에 내세운 흡혈귀상을 아마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구현해낸 바 있는데요. [Brainiac] 이라는 천하의 괴작에서 혜성을 타고 나타나는 괴인 역할을 맡았던 아벨 살라자르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만, 헤르만 로블레스라는 기골이 장대한 금발 (멕시코인이지만서도) 연기자를 기용해서 그려낸 흡혈귀 라부드의 매력이 고색이 창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어요. 물론 고전 멕시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유려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놀랄 정도로 세련된 촬영기법도 좋은 볼거리입니다. 


9. 파라오 Faraon (1966, Second Sight, Blu Ray- Region B). 


'25 PHARAOH BLU RAY COVER


매년의 리스트에서 영국의 Second Sight 에서 꿋꿋이 출시하는 고전 동유럽 타이틀들의 일환인데,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어릴 적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일본판 포스터만 힐끗 보고 “뭐지 이건? 고대 이집트 문명에 관한 사극이고 제목도 ‘파라오’ 인데 감독은 예르지 카발레로비츠?!” 라고 알쏭달쏭하게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도 완전히 이 영화의 존재를 기억의 뒤켠에 박아두고 있다가, 갑자기 어 [파라오] 를 내놓는데? 이게 근데 무슨 영화지? 라고 여전히 의문시하다가, 얼떨결에 구매했습니다. 이 한편은 지금 이집트 국민들이 관람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 지 무척 궁금한데, 실제 피라미드 유적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일면 파졸리니의 사극과 흡사한 “판타스틱 리얼리즘” 적인 접근 방식이죠) 영상을 위시하여, 이제까지 다른 영화에서 볼 일이 없었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원작 소설은 보예슬라브 프루쉬라는 19세기 폴란드 작가 (일본으로 치면 모리 오오가이나 시마자키 토오손에 해당되는 존재일까요?) 가 집필한 고전인데, 그걸 또 새삼스럽게 60년대의 폴란드에서 이집트에서 로케이션을 감행하고, 누가 봐도 동구라파 배우들로 보이는 연기자들이 구리빛 메이크업을 하고, 또 여성들이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고 등장하는 등의 시대적인 고증까지도 공을 들여서 영화로 제작했다는 사실에서 여러 겹으로 종착된 정치적-사상적 함의의 결을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8.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일곱번째 희생자 I Walked with a Zombie/The Seventh Victim (1943, Criterion Collection, 4K UHD Blu Ray). 


'25 I WALKED WITH ZOMBIE-THE SEVENTH VICTIM 4K UHD COVER


이 이야기는 영어판 리스트에서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워너 브라더스에서 출시했던 고퀄 고전 걸작 박스세트 중 하나가 발 류튼 제작자가 마크 롭슨, 로버트 와이즈, 자크 투르뇌르 등의 유능한 감독들을 기용하여 만든 흑백 호러 영화의 걸작들입니다만, 북미 컬렉터들 사이에서 지금 난리가 나고 있는 2006-2009년사이에 출시된 워너 디븨디가 썩어버려서 재생이 전혀 안된다는 문제에 덜커덕 걸려버렸습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일곱번째 희생자], [시체 도둑], [유령선] 등 모두 쓰레기통에 수납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발 류튼 박스세트는 워너에서 다른 스튜디오보다 공들여서 출시했던 고전 영화들 중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던 타이틀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다니… 다행스럽게도 이 두 편에 관해서는 크라이테리언에서 압도적인 화질과 음질의 4K UHD 로 복원이 되었습니다. 


발 류튼 제작의 걸작들, 그 중에서도 마치 듀나님께서 코넬 울리치 소설의 파스티쉬로 집필하신 40년대 뉴욕 배경의 형이상학적 미스테리 원작을 고대로 충실하게 영화화한 것 같은 (무슨 말인지 헷갈리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영화를 보시면 납득이 되실 수도) [일곱번째 희생자] 가 정말로 영화사상 유일무이한 종류의 특이한 수작(秀作)이라는 것을 보증서겠습니다. 


7. 이공년대 일본호러 컬렉션 J-Horror Rising (1999-2007, Arrow Video, Blu Ray- Region Free/A). 


'25 J-HORROR RISING BLU RAY COVER


90년대 말기-2천년대 초기에 [링] 을 시발점으로 해서, 우후죽순격으로 쏟아져 나왔던 극장공개보다는 VHS 로 더 잘 알려졌던 영화들, 북미에서는 “J 호러” 라는 명칭으로 통칭되었던 작품들의 일부가 한데 모였습니다. 퀄리티도 각양각색, 들쑥날쑥합니다만 역시 믿고 보는, 더 정확하게는 믿고 구매하는 애로우 비데오에서 긁어모은 활동사진들이니만큼 상당히 다양하면서도 당시의 분위기를 제대로 반영하는 영화들을 모아놓았습니다. [이누가미], [제절초 (弟切草)], [시코쿠 (사국 死国)], [이솔라: 다중인격소녀], [입찢어진 여자], [페르소나]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노로이], 이렇게 일곱편인데, 트랜스퍼의 화질과 음질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카도카와에서 공급한 리마스터 버전에 런던의 R3Studio 에서 추가로 보정을 가했다고 합니다만, 유일하게 추가 보정이 되지 않은 타이틀이 [입 찢어진 여자] 인데 그 퀄리티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근사한 박스세트로 뽑아준 것만 해도 고맙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시작한 거, [최면], [마레비토], [엑스테], [감염] 등의 다른 가작-괴작들도 꾸역꾸역 내주셨으면 하네요. 아 그리고 당연, J- 호러 최고의 명 캐릭터 토미에 시리즈도요. 


6. 이창동의 시: 네 편의 작품 The Poetry of Lee Chang-Dong: Four Films (1997-2010, Film Movement, Blu Ray- Region A). 


'25 POETRY OF LEE CHANG DONG BLU RAY COVER


이 박스세트에 관해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새삼스럽게 이창동 작품들을 한국어 리스트에 올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 법합니다. 한국 시장을 검색해보니 [오아시스] 와 [시] 의 블루 레이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데, [박하사탕] 이 오히려 고해상도 버전으로 나왔는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더군요. 아무튼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필름 무브먼트의 이 세트처럼 중견 또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 감독들의 작품들을 모아서 북미권에서 출시해주기를 고대하고 있고, 앞으로도 류승완, 정범식 (정가형제), 정재은, 윤종빈, 유하 감독들의 2천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이틀들을 볼 수 있기를 정말 기대하는 바입니다. 


요번에 애로우 비데오에서 출시한 [놈놈놈] 4K UHD 특별판에 만주웨스턴에 대한 에세이를 하나 기고했는데, 애로우에서는 김지운 감독 작품들을 계속 내놓을 예정인 것 같으니, 조만간 이런 종류의 명품 한국영화 박스세트들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되네요. 덧붙여 한마디 하자면 이 박스세트의 백미는 단연 [초록 물고기] 입니다. 내가 이때까지 본 어떤 90년대 한국 영화의 북미판본보다도 더 아름답고 청명한 트랜스퍼를 자랑하고, 피어스 콘란을 위시한 북미 한국 영화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한 특전도 애로우답게 만땅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5.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1954, The British Film Institute, 4K UHD Blu Ray). 


'25 SEVEN SAMURAI 4K UHD BFI VERSION COVER

이 타이틀에 대해서도 여러 말을 늘어놓을 여지는 없겠죠. 내가 생각하는 인류가 여지껏 만든 가장 위대한 영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라던가 여러 시각에서 비판이 가해졌고 그 비판들도 다 받아들일 수 있지만, [7인의 사무라이] 의 위상에 관한 나의 생각은 지난 40년동안 미동도 한 적이 없습니다) 입니다. 이 한편에 관해서만은 모든 새로운 포맷이 출시될 때마다 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계제인 것이 사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4K UHD 로 새롭게 단장된 이 영원한 걸작은 TV 화면에서 본다는 행위의 민망함을 상기시키는 대신에, 다시금 제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고 이러한 위대한 예술을 만들 수 있는 인류는 아직껏 그 가능성을 소진하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4. 고전 특촬영화 컬렉션 Classic Tokusatsu Collection (1956-66, Shout! Factory, Blu Ray- Region A). 


'25 CLASSIC TOKUSATSU COLLECTION BLU RAY COVER

이 컬렉션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혜성과 같이 (세트에 수록된 한 유명작의 스토리 설정이기도 한데 ^ ^) 등장한 토오에이 (東映) 스튜디오의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중반까지의 “특촬” 영화 컬렉션인데, 그 중 일부는 TV 시리즈와의 연관성도 있습니다. 한국 분들한테 가장 관심이 있을 만한 수록작은 바로 [황금박쥐] 실사판인데요. 황금박쥐라는 캐릭터의 역사는 거의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내 세대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망또를 두르고 배턴을 휘두르는, 아틀란티스 출신의 금빛의 해골 사나이 “황금박쥐” 의 캐릭터 설정은 (한국과 일본의 합작이었던) TV 아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 이전에 치바 신이치가 주연을 맡은 (황금박쥐로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이 한편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물론 [황금박쥐] 뿐만 아니고 거장 시라도 산페이의 좌파 민중투쟁사적 닌자 만화 [와타리] 의 싸이케델릭한 실사영화판, 고색이 창연한 닌자 액션물이면서 동시에 괴수영화고, 또 이상하게 선량한 전래 동화같은 분위기의 시대극인 [괴룡 대결전] 등, 일곱편의 수록작이 모두 “어린이들용” 적인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특촬물만 지닐 수 있는 유니크한 매력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예술적 또는 역사적인 가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순수하게 애정이 끌리는 정도로 평가하자면, 금년의 리스트의 모든 타이틀 중에서 최고입니다. 


3. 포크 호러 컬렉션 제 2집 All the Haunts Be Ours: Volume 2 (1954-2019, Severin, Blu Ray- Region A/Free). 


'25 ALL THE HAUNTS BE OURS VOLUME 2 COVER


아니, 벌써 2023년에 포크 호러 컬렉션 1집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이미 다른 명품 레이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을 까마득히 넘어선 이른바 “영순위” 타이틀이었습니다만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그 속집, 거기다가 원본 박스세트보다 훨씬 더 확장된 캔버스— 6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18개국에서 제작된 스물 세 편의 포크 호러로 분류 가능한 영화들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로 출시되었고, 이번에는 “영순위” 라는 꼼수를 쓰지 않고도 제대로 리스트에 반영시킬 수 있었습니다. 물론 손에 넣은 지 3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수록작들을 다 관람하지는 못했습니다. 


제 1집과 마찬가지로, 모든 영화들이 다 리스트에 포함될 “자격” 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영국산 바이커 좀비 영화 [싸이코매니아] 나, 역사적인 가치는 충분하지만 실제로 보면 굉장히 뻣뻣한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 같은 느낌의 핀란드산 고전 [흰색의 순록] 등은 보지 않은 분들께는 충분히 흥미롭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도 물론 있지요. 그리고 크리스토퍼 리 주연의 고전 [사자의 도시] 나 타일랜드 호러를 글로벌 시장에 알리는데 공헌한 [낭 낙] 등의 이미 다른 레이블을 통해 잘 알려진 작품들도 있고. 그러나 아무리 이러한 부위를 디스카운트 하더라도 사우디 아라비아산의 [인어공주] 잔혹동화판을 방불케하는 [비늘], 70년대에 (얼마나 검열된 버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그 사운드트랙이 대박을 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아르헨티나산 [나자리노 크루스와 늑대], 스톱 모션 아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약간 병맛의 초기 짐 헨슨 작품같은 [Blood Tea and Red String], 내가 본 바케네코 영화 중에서도 조금 비뚤어진 취향의 이색작 [괴묘 저주의 늪], 그리고 한국 사람들 (또는 고전 한국 영화 팬) 이 아닌 구매자들에게는 아마도 컬렉션 중에서도 가장 쇼킹한 한편이 아닐까 싶은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까지, 진짜 범 세계적인 괴작-숨겨진 이색작-걸작들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 


박스에 딸려오는 251페이지짜리 소 (핫하하 ^ ^) 책자는 영화에 대한 소개가 아니라 램지 캠벨과 킴 뉴먼을 위시한 작가들이 포크 호러라는 주제로 집필한 단편들을 모아놓은 “스토리북” 입니다. 하여간에 말을 말아야죠. 


2. 히치코크 초기 작품집: 무성영화에서 사운드로 Hitchcock the Beginning: From Silent to Sound (1927-32, Studio Canal, Blu Ray- Region Free/B). 


'25 HITCHCOCK THE BEGINNING BLU RAY COVER


그런데도 이 무지막지한 13장 박스세트가 금년 리스트의 1위가 아니고 3위의 위치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이 박스세트를 넘어선 위치에 가져다 놓고 싶은 출시작이 무려 두개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찌 그럴수가 있을까요? [히치코크 초기 작품집] 에 수록된 작품들 중 일부— 특히 히치코크의 무성영화들— 은 이전에 유럽 한정으로 디븨디로 발매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컬렉션의 경외스러움은 이미 백년이 가까운 시일이 지난 20년대부터 30년대 중반까지 제작된 히치코크의 영국에서의 초기 작품들을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당대의 예술작품을 복원하는 자세로 접근한 결과물에 있습니다. 복싱영화 (!) [링], 멜로드라마 [농부의 아내] 등의 무성영화작들은 British Film Institute 에서 2012년에 리마스터를 한 판본이 쓰이고 있는데, 무성영화와 토키의 두 버전으로 제작되었고 “히치코크 터치” 의 원점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갈] (1929) 의 4K 복원판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결과물입니다. 심지어는 디스크에서 유일하게 복원판이 아니고 생채기와 “비내림” 현상을 간혹 볼 수 있는 “낮은 퀄리티” 의 [살해!] 조차도 그네를 타는 트라피즈 아티스트의 정면을 찍은 카메라의 압도적인 임양감을 위시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감상하게 되는 일급 스릴러들입니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가치만으로 볼 타이틀들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순수하게 영화적인 “재미,” 오락성의 순위로만 봐도 이 리스트의 거의 모든 아이템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물론 역사가의 입장에서 부연하자면 스튀디오까날에서 상영장의 모두에 첨부했듯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대놓고 그런 구석도 있고 은근히 그런 구석도 있습니다— 묘사들이 당연히 존재하고, 이러한 묘사들이 2차대전을 기점으로 어떻게 변했는지 를 그 전에 만들어진 영화들로 판가름하는 그것대로 흥미있는 연구 대상입니다. 


1. 다이에이 고딕 컬렉션 Daiei Gothic: Japanese Ghost Stories (1959-68, Radiance Films, Blu Ray- Region Free/B). 


'25 DAIEI GOTHIC BLU RAY COVER

자 그래서 금년의 1위는 카도카와에서 압도적인 화질과 음질로 복원시킨 다이에이 영화사의 “귀신영화” 들 세편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같은 “고전” 원작을 번안한 귀신 영화들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이 리스트에 속한 다른 50-60년대 일본 장르영화들에 비해 이다지도 차이가 날 수 있는지! 이 세 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름다움”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같은 시기의 같은 회사 다이에이 제작의 영화들인데도 이렇게 다르고 또 다른 형태로 아름답고 멋있을 수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찬바라의 거장 미스미 켄지가 귀신영화라기 보다는 악인인 남성 주인공의 허장성세와 울굴에 초점을 맞춘 마초 심리 스릴러로 만들어낸 [요츠야 괴담] (1959), 사회파 명장 야마모토 타츠오가 카부키의 “다리 없는 귀신” 컨벤션을 적극 활용하고 조역 캐릭터들에게 강렬한 필름 느와르적인 필연성을 부과하였으며 눈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금빛과 암흑의 영상을 구사하는 마키타 유키마사의 촬영이 유려하기 이를 데 없는 [모란등롱] (1968), 그리고 [자토이치] 시리즈의 상련이었던 타나카 토쿠조오 감독이 설경을 배경으로 로케이션을 감행했고 후지무라 시호 여배우가 금색의 컨택트를 끼고 등장해서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괴담 유키온나] (1968), 이렇게 세 편을 아마도 공개 당시에도 이렇게 깨끗하고 멋지게 보여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퀄리티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번에는 늦어지고 늦어져서 3월의 끝무렵에나 올리게 되는 군요. 아시는 분들께서는 아시듯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이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 (末法) 의 사바로 가고 있는 데요. 최소한 지금 북미에서 영어만 쓰라고 기고만장하는 놈들과 그 놈들의 자식들보다는 한국어 하시는 분들과 그분들의 자식들의 장래는 오히려 밝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분들, 힘드실 때는 용기를 잃지 마세요. 나는 영화와 장르문학과 심지어는 K 팝 덕질에서 다른 무슨  매스컴 타는 세계적인 지식인들이 어쩌구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에너지와 성찰을 얻어내고 살고 있습니다. 영화가 계속 존재하는 이상 문명은 망한 게 아닙니다. 나처럼 고전 영화를 보시고 위안과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 올해도 멋진 리스트 감사드립니다. Q님 블루레이 리스트 매년 기다립니다.

      견신의 저주와 특촬영화 컬렉션 구매해야겠네요 :-)
    • 론스타가 블루레이로 나왔군요. 3년쯤 전에 dvd로 구입해서 재감상한 기억이 있어요. 대단한 서사시였죠.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매년 리스트 선정해서 올려주신데 감사드립니다. 저는 예~전에 출시되었던 론스타 비디오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가 DVD로 업그레이드 했었는데, 다시 블루레이가 나왔단 말에 구입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셔플이 그리 풍성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림으로 그린 표지가 너무 멋져서요;;;; 베르톨루치 '거미의 계략'의 리메이크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죽은 영웅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진실 추구가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드러나는 본 줄거리도 흥미롭지만, 병행해서 이어지는 여러 사람들의 부자/모자 관계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더 복잡한 그림을 만드는 각본이 정말 기가 막혔지요. 저처럼 미국 역사에 무지한 사람도 알라모나 멕시코 전쟁의 역사적인 맥락이 궁금해질 정도였으니까요. 세일즈 감독과 이전에도 협업한 적 있는 크리스 쿠퍼도 잘 했지만 이제는 고인이 된 엘리자베스 페냐가 여주인공으로도 역할을 잘 했는데 애매한 텔레비전 조역을 하다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쉬웠어요.
    • 매년 올려주시는 리스트 잘 보고 있습니다. 제겐 생소한 영화들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매번 Q님의 영화 지식과 애정에 놀라게 됩니다. 수년전에 올려주신 Ride with the Devil 소개글을 보고
      유학중에 도서관에서 크라이테리온 DVD를 빌려 봤었습니다만, (제 첫 크라이테리온 감상이었습니다) 직구에 대한 번거로움 때문에 작년에서야 블루레이를 구매하여 재감상했습니다.
      그러니까 소개글을 보고 구매하기까지 10년이 훌쩍 넘게 걸렸네요 ㅎㅎ 이번에 소개해주신 작품들도 찜해놨다가 그보다는 빨리 만날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회원리뷰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10 [영화] 국제첩보국 The Ipcress File (1965) 111 04-29
809 [영화] 2025 년 최고의 블루레이와 4K UHD 블루레이 스무편 1 227 04-10
808 [영화] 츠바키 산주로오 Sanjuro (1962) (4K UHD Blu Ray) 293 01-14
807 [영화] 킬 미 (2009) : Kill me too, I'm depressed 250 01-13
806 [영화] 위 리브 인 퍼블릭 (We Live in Public, 2009) : 인터넷은 프라이버시를 모른다 119 01-13
805 [드라마] 여름향기 2 118 01-01
804 [영화] 슈퍼 인프라맨 Super Inframan (1975) 151 12-22
803 [영화]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 (2025-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판) 320 11-13
802 [영화] 데인저러스 애니멀스 Dangerous Animals (2025) <부천영화제> 305 08-16
801 [영화] 엘스 Else (2024), V/H/S 비욘드 V/H/S Beyond (2024) <부천영화제> 233 07-21
800 [영화] 작전명 좀비 Operation Undead (2024)- 어글리 시스터 The Ugly Stepsi… 289 07-10
799 [영화] F1 더 무비 - 이빨 빠지고 발톱 빠진 늙은 사자의 공허한 포효 269 07-07
798 [영화] 더 슈라우즈 The Shrouds (2024) 1 268 06-06
797 [영화] (에밀리 드켄 추모) 엠마누엘 무레의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2020… 247 04-14
열람 [영화] 2024년 최고의 블루 레이/4K UHD 블루 레이 스물한편 4 585 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