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돼지의 왕 - 연상호

돼지의 왕



연상호


단편애니 지옥(이후 중편으로 확장된 지옥:두개의 삶까지)으로 특유의 스타일을 각인시켰던 연상호 감독의 신작이자 첫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소설가란 직함을 내걸지만 현실은 자서전 대필가인 종석에게 중학 동창인 경민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15년만에 전화를 걸어선 다짜고짜 만나자고 해선 술잔을 기울이던 경민은 중학교 1학년 1학기란 짧은 시간 그들의 삶에 툭 튀어나왔던 김철이란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 극은 그들의 끔찍했던 중학교 시절로 돌아갑니다.

 

성인이 되어 재회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어린시절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난다는 극의 구조는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상하는 중학교 1학년의 교실은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소년들의 세계라기 보다는 어른들의 세계를 흉내내는 애새끼들의 지옥도고요. 음... 이걸 고등학교로 무대를 옮긴다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하려는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현실의 부조리를 그대로 학교란 공간에 대입시켜 우화처럼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서 현실의 구조에서 꺼내기 힘든 설정들을 풀어보는 거지요. 제목에서 언급된 '돼지'는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지옥에서 빅브라더들이 던져주는 거짓 희망에 목맨채 뒤룩뒤룩 살을 찌우는 프롤레탈리아 계급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지배세력의 메인스트림에 들어가려 각자의 노력을 해보지만 그렇게 찌운 '살'은 결국 누군가의 먹이가 될 운명이란 거지요. 그들을 착취하는 건 힘과 돈을 가진 '개'들입니다만 사실 이들도 누군가의 '애완견'입니다. 그 위엔 무엇이 있을까요? 극에선 선명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그건 시스템일 수도 있고 이 차가운 도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옥도에서 돼지로 머물지 않고 저항하려는 아이들의 군상이 여러가지로 제시됩니다. 김철이 상징하는 아나키스트나 찬영이 상징하는 합리적 개혁가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이지요. 경민은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는 약자이자 소수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고 종석은 염세적인 무언의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식의 우화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극적 반전으로 미스터리로서의 책임에도 충실합니다. 문제의 '공개자살' 날 조회시간의 진상과 그 뒷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충격적입니다. 동시에 앞서 제시된 인물상들을 단번에 뒤집으며 일종의 극적 카타르시스를 자아내기도 하지요.

 

저예산(일것이 분명한) 애니메이션임에도 힘의 분배를 적절히 조절하고 컴퓨터를 활용한 경제적 연출로 충분한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힘을 준 부분의 연출은 정말 멋지기도 하고요. (옥상의 결투신 같은 거 말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극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지만 중학교 1학년이라는 배경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극악스런 이야기를 생각하면 애니메이션이 각본의 손실을 최소화 할 방법이라는 건 분명하지요. 그러니까 이 설정과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으로서만 순수히 기능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걸 실제 배우를 캐스팅해서 찍으려 든다면 설정을 고교로 바꾸거나 아동학대 혐의에서 안전할 수 없겠지요.

 

더빙에 참여한 배우의 면면이 흥미롭습니다. 일단 메인 캐릭터인 종석 역엔 양익준 감독이 참여하고 있어요. 자기 작품 똥파리에서 주연으로 좋은 연기를 보인 바 있는 만큼 역시나 안정적입니다. 상대역 격인 경민 역엔 오정세 배우가 참여했는데 얼마 전 본 커플즈에 이어 그가 출연한 영화를 연달아 보게 되는 셈이네요. 왠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아역엔 대부분이 여자 성우가 더빙을 맡았습니다. 일단 주요 배역인 김철 역엔 김혜나씨가 그리고 어린 경민과 종석엔 무려 박희본과 김꽃비가 참여했네요. 저에겐 여전히 SM 아이돌로 더 기억에 남아있는 박희본은 인디계의 여신이라도 될 모양입니다. 그리고 김꽃비씨야 뭐... 양익준 감독이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ㅋㅋ (이거야 말로 진정한 지인 캐스팅)

한국 애니메이션으로서 이런 작품을 접한다는 건 축복입니다. 안타까운 건 개봉관이 너무 적다는 거죠. 서울은 어떤지 몰라도 대구에서 이 작품을 보려면 아트하우스인 동성아트홀이나 L극장의 심야상영을 '노려야'만 하니까요. 여튼 이거 보려고 거의 '15년' 만에 동성아트홀을 가보았습니다. 여기서 빽투더퓨처2를 볼때만 해도 그냥 동성극장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지요. 그런데 같은 건물 2층에 있던 맛나는 칼국수 집은 없어진 모양입니다.

 

    • 제목도 포스터도 굉장히 침울한 느낌이었는데, 내용도 그런가보네요... 보고싶은데 보고나면 기분 다움될까봐 걱정되요..
    • 어떻게 보면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긴데 힘있게 잘 밀어붙였더라고요. 결말도 강렬하고.
      돼지들은 프롤레타리아라기 보다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의 약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민이가 나름 돈이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는 것도 그렇고요.
    • 오늘 봤습니다.
      그리고 방금 clancy님의 이 리뷰를 읽었어요.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개인적으로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실 기대가 컸기에 실망도 컸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에요.
      저예산이기에 그림체나 영상 효과가 조악하다는 걸 양해할 수는 있어요.
      그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영화는 너무 '후집니다'.
      너무나 진부한 얘기를 너무나 진부한 방식으로 합니다.
      제가 중학생 때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었는데,
      만약 이 영화를 중고등학생들이 본다면 제가 그 당시 느꼈던 딱 그 정도의 신선함과 생경함 그리고 뭔가 대단함을 느낄 수도 있어요.
      문제는 이 영화가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것.
      제가 그 소설을 읽고, 박정희 정권의 은유를 읽었던 것처럼
      중고등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지금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시 인지할 수 있겠죠.
      우선적으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이 진부했고, 보여주는 데에서 그쳤다는 아쉬움이 많아요.
      결론적으로 전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없고, 평단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의 극찬에 동의할 수 없어요.
      무척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재 한국의 비루한 현 상황이 이러한 영화를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합니다.
    • sae rhie / 어떤 지점에서 실망하신건지 알것 같아요. 이야기가 직선적이고 강하다보니 (그리고 얼른 몇몇 레퍼런스들이 떠오를 만큼 전형적 구조이다보니) 진부해보이는 거죠. 후지다는 점은 저로선 좀 글쎄요...랄까요. 후짐을 평가하는 기준의 차이겠지요. 과대평가의 경우엔 일단 독립장편애니에서 이런 주제, 이 정도 완성도가 좀처럼 나오기 힘든 국내사정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 sae rhie/ 저도 어제 봤는데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배경을 1990년대초로 바꾼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낯익다 싶었지만 배경이 1990년대로 바뀌면서 이문열 소설과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들이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지금 젊은 관객들이 즐기기엔 1990년대 초반은 너무 옛날 얘기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20대들은 19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에 중고등학교를 다녔거든요. 이때만 해도 일본에서 이지메가 왕따로 수입돼 들어오면서 학교 분위기가 싹 바뀌었을 때니까요. 이 당시에 학교를 다닌 아이들이 이문열 소설을 새로 쓴다면 전 더 재밌게 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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