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가장 억울한 죽음

변기 위에 쭈그려 앉아 바닥의 타일 무늬를 살펴보던 어린 놈의 머리 속에 무당의 신기(神氣)가 통했는지 타일 무늬의 점들이 사람의 얼굴이 되어 자신의 사연을 얘기한다.

 

점(點)들은 얼굴이 되어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데, 누가 제일 억울하게 죽었는지 그걸 정해달란다.

 

마치 세 여신의 경쟁 속에 트로이 전쟁의 서막을 열고 말았던 '파리스'처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고 그들의 억울함의 최고를 결정짓는다.

 

첫번째 죽은자가 그 입을 연다.

 

"나는 임진왜란 때 왜놈의, 왜놈의 그 시퍼런 칼에 베여죽었소. 보시오. 여기 귀가 없잖소."

 

두번째 죽은자가 연이어 입을 연다.

 

"내래 6 25 당시 인민군 부역 나갔다가 죽었디요. 살려고 일을 했더니 그게 죽을죄가 됬지 않캈소. 이 편인지 저 편인지 촌놈인 내가 어찌 알갔디요. 좌인지 우인지 그건 먹물들이나 하는 얘기고 우리 같은 무지랭이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뿐이지 않갑습네까. 총구를 들이대고 죽이겠다고 하니 살려고 일을 했을 뿐이지 않캈습디요. 총을 겨루고 감자 포대 옮기라기에 감자 포대 몇 개 날랐시기요. 인민군이 가면서 나눠준 감자 몇 개 먹었슴메다. 그놈들 눈에도 겁에 질린 모습이 불쌍해보였던 게 아니겠슴메. 용쓰고 배고픈데 먹으니 감자가 달지 않캈소. 어찌 그게 죽을 죄가 되겠디요."

 

세번째 죽은 자는 입을 열지 않는다.

 

악다구니를 쓰듯 자신의 억울함을 토해내던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세번째 나타난 원혼은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입을 열지 못한다.

 

나는 세번째 죽은자, 그 말없는 여자 원혼에게 가장 억울한 죽음의 자리를 정해준다.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지지 못하는 죽음, 나 이렇게 죽었소 나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소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 세상의 어둠 속에 그 진실이 가려진 죽음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죽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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