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2026)


에머랄드 페넬의 [폭풍의 언덕]을 보았습니다. 만족스러운 각색물이 많지 않은 영화죠. 아무래도 소설의 구조를 영화에서 다 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각색물들을 다 챙겨본 건 아니니 제가 못 본 작품 중 좋은 영화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폭풍의 언덕] 영화들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전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도 좋아하고 안드레아 아놀드의 영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폭풍의 언덕]에서 기대하는 그 느낌을 온전히 다 갖춘 작품은 별로 없죠. 페넬의 영화는 어땠냐고요. 음, 재미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챙겨본 [폭풍의 언덕] 각색물 중 가장 지루했어요.

 이 영화도 당연히 원작을 충실하게 살린 영화는 아닙니다. 많이들 그러는 것처럼 일단 캐시의 죽음으로 끝나요. 그런데 힌들리는 나오지도 않고 캐시는 아기를 낳지 않고 죽으니 조금 더 단순화된 각본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아는 [폭풍의 언덕] 소설의 후반부가 이어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게 없어요.

영화는 그 빈 자리를 섹스로 채워넣습니다. 이 영화에서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죽어라고 섹스를 해요. 주인공들이 원작에서 안 하는 짓을 하는 것 자체를 뭐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히스클리프가 캐시와 제대로 된 섹스를 한 번도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이 남자가 죽을 때까지 불만족한 상태로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의 기반이 아니었나요. 이렇게 자주 해버리면 오히려 캐릭터의 욕망과 갈등의 연료가 휘발되어 버리잖아요. 전 진심으로 영화를 보면서 캐시가 빨리 죽길 바랐습니다. 운명의 상대와 저렇게 섹스를 해대는데 삶이 지루하기 그지없다면 저 사람의 권태엔 해독제가 없어요.

이 영화의 히스클리프는 무지 안전한 존재입니다. 보다 보면 소설에서 중요한 유해한 남성성이 수상쩍을 정도로 제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특히 부자가 되어 돌아온 뒤로는 오로지 캐시와 이자벨라의 섹스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걸요. 이자벨라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을 보세요. 여기서 히스클리프는 이자벨라에게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를 것인지를 고백하는데, 이건 그냥 BDSM 게임의 시작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세이프 워드도 정해놨을 거 같아요. 원작의 소설 속 여자들의 행동 상당수가 히스클리프의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대응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더 어이가 없습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이 모든 게 원작의 고딕 호러의 분위기를 날려버린다는 거죠. 전 페넬이 소설의 유령을 없애고 그 빈 자리에 섹스를 채워넣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워낙 각색물들이 많으니 남들이 안 한 걸 해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게 더 재미있나요? 암만 생각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의상이나 세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고증을 꼭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못생긴 의상과 세트를 택할 수도 있죠. 하지만 거기엔 예술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엔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의 캐스팅은 그냥저냥입니다. 로비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배우지만 캐시로서는 아닌 거 같습니다. 너무 어른이고 너무 건강하고 너무 제정신이고 너무 금발입니다. 엘로디는 그냥 커다란 강아지 같습니다. 안전하고 섹스 잘 할 거 같아보이고. 그 뿐입니다. 컬러 블라인드 캐스팅된 홍차우와 샤자드 라피트가 배우로서는 더 그럴싸합니다. 일단 에드가 린턴을 연기하는 샤자드 라피트는 원작 캐릭터에 가장 가까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단지 배우가 서남아시아 혼혈일 뿐이죠. 홍차우의 넬리는 영화 내내 '이 미친 백인들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보자'가 새겨진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게 꽤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의 인종을 스토리에 반영했어도 좋았을 걸 그랬어요.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26/02/22)

★★☆

기타등등
영화 개봉 이후 [폭풍의 언덕] 원작의 판매량이 급증했다는데,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 독서 기회로 연결되었다면 다행이죠.


감독: Emerald Fennell, 출연: Margot Robbie, Jacob Elordi, Hong Chau, Shazad Latif, Alison Oliver, Martin Clunes, Ewan Mitchell,

IMDb https://www.imdb.com/title/tt32897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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