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회 아카데미 상에 대해 몇 가지...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2026년 3월 15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시상식은 코넌 오브라이언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총 24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총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최다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라이언 쿠글러의 [싸너스; 죄인들]은 남우주연상 등 4개 부문을,
기에르모 델 토로의[프랑켄슈타인]은 미술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2개 부분 수상으로 뒤를 이었고 [햄넷], [웨폰], [F1], [아바타: 불과 재]가 각각 상을 하나씩 받았습니다.
올해의 승자는 워너 브라더스였습니다. 이번 시상식에서 워너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씨너스: 죄인들],
[웨폰]으로 받은 상은 11개로, MGM의 [벤허], 파라마운트의 [타이타닉], 뉴라인 시네마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갖고 있었던 최고 기록과 타이입니다. 단지 이전 기록과는 달리 같은 영화사 영화 세 편이 상을
나누어 가졌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유력했던 두 편의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와 [씨너스: 죄인들] 중
어느 쪽이 상을 가져가도 워너가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승리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올해의 아카데미상을 워너 브라더스가 독립된 메이저
스튜디오로서 거두는 마지막 영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현재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와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인수 합병이 최종 단계에 있으며, 이는 스튜디오의 정체성 변화를 예고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오랜 역사의 필름 스튜디오의 종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얼마 전에 “우파 트럼프 편인 엘리슨 일가가 곧 TikTok, CBS, CNN, HBO, 디스커버리 채널,
BET, 카툰 네트워크, 코미디 센트럴, DC 스튜디오, 판당고, 미라맥스, MTV, 니켈로디언, 파라마운트,
플루토TV, 쇼타임, TBS, The CW, TNT, 워너 브라더스 등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올리가르히다.“라는
트윗을 올렸습니다. 샌더스의 눈을 거치지 않더라도 이 모든 게 디스토피아 영화의 서막처럼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올리가르히라는 말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한 번 언급되었습니다. 작년 DMZ 영화제의
개막작이었고 이번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상 수상작인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러시아인 주인공 파벨 탈란킨과 함께 감독한 데이비드 보렌스타인이 수상소감에서 이 단어를 썼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합니다. “작업하면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수많은 작은 공모 행위들을 통해 나라를
잃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우리가 침묵으로 동조할 때, 올리가르히가
미디어를 장악하고 우리가 정보를 만들고 소비하는 방식을 통제할 때 우리 모두는 도덕적 선택에
직면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무명인조차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시작한 뒤부터 교육과정을 통해
러시아 학생들을 어떻게 세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지만 미국측 감독 보렌스타인의
소감은 러시아만큼이나 트럼프 정권하의 지금 미국을 겨냥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는 러시아와 지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겐 나쁜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영화가 지금 전쟁의 공범자인 러시아 사람들을 무해한 희생자로 미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두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단 한 번도 우크라이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지적됩니다.)
워너 파라마운트의 합병, 이란 전쟁,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집단 학살, 미국 내부의 언론과 인
권 탄압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던 해였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코난 오브라이언의
진행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티모테 샬라메의 ‘오페라와 발레 실언’을
비꼰 농담 정도였습니다. 나머지는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작품상을
수상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패러디한 마지막 죽음 농담은 이런 처참한 상황에 대한
자학농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어요.
시상자 중 트럼프의 언론 장악을 직접 비판한 건 다큐멘터리 시상자였던 지미 키멜 한 명뿐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언론 자유를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저는 어디라고 말할 자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CBS 정도로 해두죠.”) 가장 선명한 정치적 발언을 한 사람은 국제영화상을
시상하러 나온 하비에르 바르뎀(“전쟁 반대. 팔레스타인에 자유를”)이었는데, 바르뎀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시상식에 초대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니, 아마도 이건 그냥 계획된 이벤트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외국인 시상자에게 정치적 발언을 허용하는 식으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라 많이
비겁해보이기도 합니다. 정치 이야기라면 [센티멘탈 밸류]로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요아킴 트리어의
다소 안전하게 들리는 발언(”모든 성인은 모든 아이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말자“)도 포함되는데, 트리어는 무대 뒤 기자회견에서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수단이라는 고유명사를 추가해 그 감상에 구체성을 부여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모두가 예상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이었습니다. [골든]의 무대 공연은 다들 “김구 선생님…”으로 시작되는 인터넷 밈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올해 아카데미의 하일라이트였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의 결과가 국내
영화계와 상관이 없다고 냉소적으로 보지만, 한국 문화를 다룬 영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졌다면 그 의미는 여전히 큽니다. 단지 공동 작곡가 이유한의
'수상소감이 초반에 끊겨버린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이 소동은 아카데미의
무심한 인종차별의 사례로 계속 언급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유한과 다른 작곡가
마크 소넨블릭은 이후 무대 뒤 기자회견에서 감상을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올해의 기록을 세운 또다른 사람은 [씨너스: 죄인들]을 촬영한 어텀 듀랄드 아카파우로,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감독입니다. 드디어 다음 여성 수상자로 이어질 유리 천장 하나가
깨졌습니다. [씨너스: 죄인들]의 마이클 B. 조던과 [웨폰]의 에이미 매디건의 수상으로, 올해는
연기 수상자 절반이 호러 영화에서 나왔습니다.
올해의 행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카데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로컬 행사임에도
전세계의 관심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할리우드가 영화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미국이라는
나라가 서구 문화의 보편성과 진보를 대표하고 있다는 암묵적 합의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허울이 벗겨진 뒤에도 이 행사는 지금까지의 의미와 무게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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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아카데미 시상식 리뷰 오랜만이네요 찾아보니 12년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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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스카 리뷰 오랜만이네요. 옛 홈페이지 생각도 나고 좋아요. 정치적 상황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한 상황인데도 뭔가 축하를 해야하니 뻘쭘한 분위기에 코난도 되게 조심해서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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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님의 정제된 어조를 오랜만에 보는 거 같아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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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시상식 챙겨보지도 않았지만 리뷰는 흥미진진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