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보았습니다. 이 한국 제목은 일본어 제목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을
대충 직역한 것으로 (‘메리‘가 빠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 제목인 [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모두 쓰이지만 아무래도 영어 비중이 높은 영화이고 타이틀도 영어이니,
영어 제목을 원제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전 그렇게 느껴집니다. 두 제목 모두 일본스럽게 어색한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더 유명한 데이비드 린의 [ 콰이강의 다리]와 여러 모로 비교되는 영화입니다. 두 작품 모두 일본군 포로수용소의
영국인 포로들 이야기지요. 모두 실제 포로수용소 경험이 있는 작가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고요. 이 영화의 원작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로렌스 판 더르 포스트라는 작가가 쓴 [The Seed and the Sower]이고 여기에 같은 작가가
쓴 [The Night of the New Moon]의 몇몇 요소들이 삽입된 거 같습니다. [The Seed and the Sower]는 같은 수용소
배경의 중편 세 개를 엮은 연작집이고요. 오시마 나기사가 자기만의 [콰이강의 다리]를 만들 야심을 품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일본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서양 영화를 만든다는 야심 같은 게 있었습니다.
영화 제목의 존 로렌스는 데이비드 보위 캐릭터의 이름이 아닙니다. 톰 콘티가 연기하는 영국 장교 이름이지요.
이 사람은 비중만 빼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관찰자에 가깝지요.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로렌스와 연결됩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영국인이니까요, 여기서
놀라운 점은 톰 콘티가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는 사실이죠. 다 발음을 암기해서 연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아는 언어를 하는 사람의 자신감이 느껴지거든요. 발음이 어떻건.
로렌스를 통해 우리는 대충 세 사람을 알게 됩니다. 데이비드 보위가 연기하는 영국인 장교 잭 셀리어스 소령,
사카모토 류이치가 연기하는 포로수용소 소장 요노이 대위, 그리고 기타노 타케시가 연기하는 부사관인 하라
겐고. 하라 겐고는 로렌스와 직접 엮여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인물이고, 셀리어스와 요노이는 이 영화의 퀴어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직접 둘이 연애를 하는 건 아니고, 요노이가 일방적으로 셀리어스에게
집착하는 거죠. 이 상황은 셀리어스 역에 데이비드 보위를 캐스팅한 것으로 그냥 설득력을 가집니다. 영화가
나온 1980년대에는 더욱 그랬고요.
[콰이강의 다리]가 그렇듯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어떻게
다들 이상하게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지요. 그 이상함 일부는 사실 자연스러운 욕망이 사회적 억압과
전쟁의 광기 속에서 비틀려져 표현되는 것이고요. 그걸 대표하는 게 바로 셀리어스에 대한 요노이의 욕망인
거죠. 물론 여기엔 일본인의 서구 선망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걸 극단화시키기 위해 오시마 나기사는 데이비드
보위의 머리칼을 금발로 염색했습니다. 영화는 전쟁 중이라도 보다 단순한 욕망을 가진 평범한 사람과는 말이
되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도 보여주는데, 그걸 대표하는 사람이 하라 겐고지요.
[콰이강의 다리]처럼 ‘걸작‘은 아닙니다. 걸작을 만드는 그 예술적 통일성이랄까, 그런 게 부족해요. 척 봐도
모든 게 좀 어색해 보입니다. 일본어 영화에서는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던 오시마 나기사의 스타일이 영어
영화에서는 튈 수밖에 없지요. 사카모토 류이치나 기타노 타케시는 당시 전문 영화 배우가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이 뻣뻣한 연기를 보여줄 수밖에 없고요. 이 영화에서는 데이비드 보위가 훨씬 노련한 배우입니다.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는 영국 배우들을 그냥 방치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이렇게 좀 덜컹거리는 영화들이
가지는 특별한 매력 같은 게 있잖아요. 그게 영화의 주제와도 맞는 거 같고. 매끄러운 걸작들이 잡아내지
못하는 거친 감정과 사건들이 있죠. 이런 영화들은 그런 것들을 덜 수치스럽게 여기거든요.
그래도 결국은 영화음악으로 가장 자주 기억되는 작품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첫 영화음악인데, 타고났나 봐요.
저도 이 영화를 FM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틀어주는 것을 듣고 자랐어요. 수입되지 않은 영화였지만
거기서 결말까지 다 알려줘, 영화를 처음 보기 전에 이미 내용을 다 안 상태였지요.
(24/12/07)
★★★
기타등등
1. 네덜란드인 장교를 겁탈했다는 죄로 할복을 강요당하는 조선인 군인이 나옵니다. 이걸 보고 김수용
감독(이었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던 분이니까)이 오시마 나기사에게 ”이건 일본인의
편견이 반영된 장면이다. 한국엔 동성애자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걸 들은 적 있어요. 단지 제 기억은
확실하지 않으니 누가 확인해주었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이 묘사는 그렇게 거슬리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그게 성폭행이 아니었다는 걸 비교적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니까요. 그 뒤에
벌어지는 사건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예고한다는 게 걸린다면 이해하겠지만.
2. 로렌스 판 더르 포스트는 생전에 꽤 영향력 있는 '구루'스타일의 유명인사였던 모양인데, 사후에 문제가
많은 사람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건 놀랍지 않습니다. 허풍쟁이였던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하지만 14살 여자애를 성폭행해 임신시켰다면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밖에 없죠.
감독:
Nagisa Ōshima,
출연:
David Bowie, Ryuichi Sakamoto, Takeshi Kitano and Jack Thompson,
다른 제목: Senjou no Meri Kurisumasu, Furyo
IMDb hthttps://www.imdb.com/title/tt0085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