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Die Gezeichneten (1922)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1922년작 독일 영화 [서로 사랑하라]는 덴마크 작가 오게 마델룽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당시엔 베스트셀러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오직 드레이어 영화의 원작으로만 기억되는 거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 자체도 그렇게까지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지요. 드레이어 회고전 같은 걸 하면 종종 더 유명한 영화들과 함께 상영되지만 그냥 그 정도. 지금은 유튜브 같은 데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은 높습니다. 사실 웬만한 무성영화 고전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접근성이 상당히 높아요. 정말 놀라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기회를 활용하지 않죠.

러시아 유대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905년에 끝나요.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나요. 맞아요. [지붕 위의 바이올린]요. 시기와 사건들이 겹칩니다. 두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어요.

영화는 한네 리베라는 유대인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사람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야기의 중심에 있긴 해요. 학교에서 부당하게 퇴학을 당하고, 사샤라는 운동권 남자와 엮이는 등 뭔가 계속 일이 벌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뭔가를 하지는 않아요. 보는 내내 좀 갑갑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격동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살아가며 드라마도 더 많습니다. 억압을 피해 유대교를 버리고 정교회인으로 살다가 유대인 이웃들의 탄압을 목격하고 맞서 싸우는 한네 리베의 오빠 야코프만 봐도 그렇죠.

보다 보면 원작 소설이 과연 무성영화에 맞는 텍스트이긴 했는지 의심이 듭니다. 물론 1922년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지나치게 인터타이틀에 의존하고 있는 영화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관객들의 관심이 흩어지기도 하고. 유성영화 시대에 다시 리메이크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그 이후 원작 자체가 잊혔겠지요.

산만하던 스토리는 비밀경찰이 인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유대인들을 모함하기 시작하면서 재미있어집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의 스토리로 모이기 시작하고, 일단 여기서부터 영화의 리듬이 바뀌거든요. 물론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진짜로 끔찍합니다.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 그러니까 포그롬으로 이어지지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겐 이 약탈과 살육의 묘사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희생자들은 유대인들이에요.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폭력의 묘사는 지금 가자에서 일어나는 일과 너무나도 비슷해요. 얼마 전까지 이웃이었던 사람들에게 모든 걸 잃고 “나한테 권총을 준다면 러시아인들을 다 죽여버릴 거야!”를 외치는 영화 속 유대인 여자아이에게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가자 지역의 어느 쪽에 속해 있을까요. (24/12/17)

★★★

기타등등
많은 무성영화들이 그렇듯 다국적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망명한 러시아 배우들, 막스 라인하르트 극단원들,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 배우들. 이런 다국적 협업이 당시엔 큰 의미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감독: Carl Theodor Dreyer, 출연: Polina Piekowskaja, Wladimir Gaidarow, Thorleif Reiss, Adele Reuter-Eichberg, Johannes Meyer, Richard Boleslawski, J.N. Douvan Tarzow, Sylvia Torf as Zipe, Hugo Döblin: Abraham, 다른 제목: The Stigmatised, Love one anoth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1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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