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익스프레스 Horror Express (1972)

[호러 익스프레스]는 크리스토퍼 리와 피터 쿠싱이 한 팀으로 나오는 드문 영화라는 점에서 호러 팬들 사이에 유명합니다. 유일한 영화는
아닐 거예요. [바스커빌가의 사냥개]에서도 둘은 적수가 아니었죠. 근데 이렇게 둘이 어깨를 함께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다른 영화는 생각이
안 납니다.
배우를 보면 해머 영화 같지만 아닙니다. 심지어 영국 영화도 아니지요. 스페인 영화에요. 감독은 에우헤니오 마르틴이란 사람이고
영화는 마드리드에서 찍었고 쿠싱과 리, 텔리 사발라스와 같은 영어권 스타들을 제외하면 주로 스페인 배우들이 나와요.
대사 상당 부분은 더빙되었고. 두 주연배우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령하는 영화라 티가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시대는 20세기 초입니다. 상하이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무대입니다. 열차는 당시 배경 열차 영화 안에
있을 법한 온갖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요. 경찰, 과학자, 엔지니어, 귀족, 스파이 등등. 여기서 크리스토퍼 리가 연기하는 사람은
알렉산더 색스턴 경이라는 인류학자인데, 얼마 전에 만주에서 냉동된 원시인 시체를 발견해서 그걸 영국으로 가져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상하이의 역에서 색스턴은 동료이자 라이벌인 웰스 박사를 만나요. 그리고 그 사람이 피터 쿠싱입니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시체가 든 상자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한 명씩 죽어나갑니다. 이들의 시체는 모두 눈이 하얗게
변해 있어요. 초반에 원시인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상자에서 탈출하고요. 그리고 이 괴물은 그 동안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SF입니다. 이 원시인은 사실 먼 옛날 외계에서 온 존재의 숙주였던 거죠. 이렇게 말하면 존 카펜터의
[괴물]이 생각이 나는데, 두 영화는 의외로 비슷합니다. 내용과 설정만 놓고 비교해 보면 이 영화는 존 W. 캠벨의 [거기
누구냐?]를 첫번째로 각색한 크리스찬 니비의 [괴물]보다 캠벨의 소설과 더 비슷합니다. 카펜터가 [괴물]을 만들기
전에 [호러 익스프레스]를 보았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고.
관객들은 당연히 쿠싱과 리의 존재감과 어울림을 기대했을 거고, 영화는 가능한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둘이
서로를 죽이려고 으르렁거릴 때의 긴장감은 없는데, 그래도 영국 과학자들이 적당히 경쟁해가며
진상을 밝히고 괴물을 사냥하는 그림은 무지 만족스럽습니다. 왜 영국 사람들은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먼저 안 했을까요.
이들은 악역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마르틴은 색스턴 경의 제국주의 시절 영국 상류층 사람의 차갑고
재수없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지우지 않는데, 그것도 좋았던 거 같습니다.
SF로서 영화의 과학은 많이 대충인데, 그래도 1시간 반의 러닝타임 동안 후딱후딱 이야기를 전개시켜야 했을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존 카펜터의 [괴물]도 과학이 그럴싸한 영화인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 없지만 재미있는 설정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시인 눈 안에 액체를 짜서 현미경으로 보면 괴물이
전에 봤던 것들이 보인다거나. 그것들 중엔 공룡이나 익룡도 있어요.
쿠싱과 리의 콤비 플레이 다음으로 좋았던 것은 아무래도 이 작품이 열차 영화로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 공간, 다양한 사람들, 열차여서 가능한 그 특별한 물리적인 현상과 같은 것들이 모두 있어요.
그리고 후반에 가면 그것들이 정말 만족스러운 물리적 클라이맥스로 연결됩니다. 카펜터의 [괴물]처럼
걸작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상태로 질주하는 영화예요.
(25/11/22)
★★★
기타등등
텔리 사발라스가 연기하는 러시아 장교가 두 영국 과학자들에게 "당신들은 표현의 자유를 믿소?"라고
이죽거리며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영화는 프랑코 정권이 붕괴되기 몇 년 전에 만들어졌지요.
이게 그냥 기계적으로 나온 대사인지, 뼈가 든 뭔가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감독: Eugenio Martín,
출연: Christopher Lee, Peter Cushing, Alberto de Mendoza, Silvia Tortosa, Julio Peña, George Rigaud, Ángel del Pozo,
Telly Savalas
다른 제목: Pánico en el Transiberiano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68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