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2025)


윤가은의 [세계의 주인]은 남자친구와 진한 키스를 하는 고등학생 여자애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윤가은 영화가 이렇게 시작할 거라고 예측한 관객은 거의 없었겠죠. 하지만 윤가인의 첫 장편인 [우리들]이 2016년작이고 그 영화에 출연한 주연배우들이 벌써 20대 초반이니, 윤가인 캐릭터들이 같이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꽤 오래 전부터 구상된 영화였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연스러움은 그냥 우연이었던 거죠.

도입부에서 키스하던 아이는 이주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입니다. 학교에셔 인기가 좋고 공부도 꽤 잘 하는 아이로, 대체로 시끄럽고 씩씩합니다. 이 아이로 요란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할 거 같은데, 관객들은 방심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중반까지 진상을 감추고 있고, 영화를 본 관객들도 최대한 스포일러 노출을 자제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 영화가 무얼하려고 하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의 일상이 그려지는 동안 몇 분 마다 이 아이가 감추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단서들을 감추는 것 없이 툭툭 떨구거든요. 마치 팀파니를 치는 것처럼요. 쿵. 쿵. 쿵.

조금 더 지나면 주제가 전면적으로 드러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출옥해서 돌아오는 범죄자가 동네로 오는 걸 막으려고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 범죄의 성격이 주인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디테일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고백이 나올 때까지는 한참 걸립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주인을 보게 됩니다.

영화가 스포일러를 노출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건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주인의 비밀이 주인이라는 캐릭터를 정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겪은 일은 끔찍하지만 그 아이의 삶 모두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주인은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윤가인은 주인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하고 그게 이 작품의 풍요로움과 연결됩니다.

보기 힘든 영화는 아닙니다. 적어도 예상했던 수준은 아니에요. 윤가은 영화 중에서는 [우리들]이 진짜로 무서웠지요. 전 그거 블루레이로 사놓고도 다시 못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벌써 두 번 더 보았고 앞으로도 더 볼 생각이 있습니다. 끔찍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화지만, 적어도 주인의 세계는 선량하거나 선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끔 눈치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갑자기 살아난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이 세계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대한 올바르고 아름답습니다.

영화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합니다. 복잡한 기교는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특별히 배우들에게 명연기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정확한 지점에 놓여있어서 다른 영화에서라면 인위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느껴졌을 것들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동생이 학예회에서 하는 마술쇼를 보세요. 주제와 상징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지만 정확한 지점에서 정확하게 자기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도저히 지적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 미스터리를 부여하는 익명의 쪽지들도 마찬가지예요. 이 영화에는 거장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소나타에서 들을 수 있는 간결한 우아함이 있습니다. (25/11/23)

★★★☆

기타등등
트리거 워닝이 필요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스포일러 정책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웁니다.


감독: 윤가은, 출연: 서수빈, 장혜진, 고민시, 이대연, 김정식, 강채윤, 김예창, 이상희, 이재희, 김석훈, 다른 제목: The World of Love

IMDb https://www.imdb.com/title/tt37661885/

    • 오타 신고: 윤가인->윤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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