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일 수밖에 (2025)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저 사람은 말하는 시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김대환의 [비밀일 수밖에] 도입부에서 가장 말이 많고 시끄러운 캐릭터인 중년 남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들과 아내에게 온갖 험악한 말을 퍼붓고 나간 남자는 몇 분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요. 갑작스러운 사고라 그 뒤 몇 분 동안 발생한 수많은 변수가 그 사람의 삶을 끊는 데에 영향을 끼쳤겠죠. 당연히 아내와 아들도 그 일부였겠지만 그렇다고 가족을 탓하는 건 웃기지 않겠어요.

13년의 세월이 휙 흐릅니다. 아내인 정하는 그 뒤 장만한 넓고 예쁜 집에서 살면서 미술교사로서 경력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아들 진우는 그 뒤로 캐나다에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의사 경력을 밟고 있는 제니라는 여자친구도 생겼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은 남자를 그렇게 그리워하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정하는요. 이 사람에겐 이제 10년 넘게 사귄 지선이라는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진우와 제니가 정하가 사는 춘천을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지난 10여년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살았을 거 같던 정하의 인생은 극도로 압축된 대소동에 말려듭니다. 일단 진우가 제니와 결혼하겠다네요.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어학원 직장을 관두고 얼마 전에 시작한 유튜버 일에 집중하겠답니다. 그리고 제니의 엄마와 아빠가 예고도 없이 춘천에 오는데, 이 아빠라는 인간이 교포 개신교 한남의 엑기스를 모아 놓은 거 같은 부류입니다. 13년 전 죽은 남자가 안 떠오를 수가 없어요. 이러니 아들에게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고백한다는 계획은 틀어져 버립니다.

대놓고 코미디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것도 아주 장르적인. 보통 때 같으면 만날 리가 없는 사람들이 결혼과 같은 가족사로 만나서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이야기요. 할리우드 영화들이 주로 떠오르지만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의 예도 비교적 쉽게 들 수 있지요.

단지 영화가 웃기느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재미있는 영화이고 유머의 비중도 큽니다. 하지만 [이반리 장만옥]에서처럼 극장 안에서 소리내어 웃을 생각은 안 들어요. 주인공들이 고통을 겪어서가 아니라, 그 고통을 보고 웃을 단계까지 영화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미디이지만 그 정도까지 코미디는 아닌 거죠. 진지한 드라마가 필요한 단계라면 영화는 굳이 코미디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의 질감은 꽤 복잡해집니다. 심지어 상당히 순수한 스릴러까지 가기도 해요. 그 단계를 넘어서도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지만, 선명한 악역이 있는 영화입니다. 구닥다리 가부장들이죠. 부부 관계의 역학이 변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숨기고 있던 퀴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권위가 시들어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주변 모두가 괴롭고요. 도입부의 죽음은 이 상황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이런 게 한 번 더 일어나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죠. 그만큼 영화가 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가혹할 정도로 냉정해요. 그만큼 주제도 선명해지죠. 그리고 소동 끝의 결론은 긍정적이고 씩씩합니다. 조금 나이브할 수는 있어도.

좋은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그들의 그만큼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우린 전엔 기대하지 못했던 몇몇 활용들을 보게 되죠. 레즈비언 커플로 나오는 장영남과 옥지영도 있고, 최악의 가부장으로 나오는 박지일도 있고. 그리고 전 정말 이 영화에서 장영남 미모의 절정 중 하나를 본 거 같아요. (25/09/15)

★★★

기타등등
'옥지영이 어른이 되어서 장염남과 사귈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라는 무지 바보 같은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두 사람 나이 차는 그렇게 크지 않아요. 당연하잖아요.


감독: 김대환 출연: 장영남, 류경수, 옥지영, 스테파니 리, 박지아, 박지일 다른 제목: Homeward Bound

IMDb https://www.imdb.com/title/tt37542644/

    • 레즈비언 장영남인데 미모의 절정까지 보여준다니 이건 놓칠 수가 없겠네요. 옥지영이 아역 때 유명했던 배우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고양이를 부탁해의 지영이었네요. 아직 잘 활동하고 계셨던
    • 옥지영이 아직도 고양이를 부탁하는 소녀일 것 같은 인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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