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 로맨스 Sluzhebnyy roman (1977)


[오피스 로맨스]는 제목이 장르인 영화입니다. 사내연애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사내연애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와 이 영화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원제와 제작연도를 보세요. 브레즈네프 시절 소련에서 만든 사내연애 로맨틱 코미디예요. 이런 걸 얼마나 보셨나요.

감독인 엘다르 랴자노프가 공동 각본가였던 연극을 영화화한 이 작품의 무대는 모스크바에 있는 어떤 관청입니다. 일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통계를 다루는 곳 같아요. 남자주인공 아나톨리는 혼자서 아들 둘을 키우는 이혼남입니다. 당연히 사는 게 힘들어요. 애들은 늘 사고를 내고 돈은 궁하고. 승진했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제네바에서 2년 동안 있다가 돌아온 대학 동창 유리가 직장에서 마녀 취급을 받고 있는 모태솔로 상사 류드밀라에게 친근하게 접근하라고 제안합니다. 유리가 연 파티에서 아나톨리는 유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그 결과는 재난에 가깝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 뒤로 의외로 가까워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둘은 이런 종류의 로맨틱 코미디가 가는 길을 대부분 갑니다. 서툴게 연애를 시작하다가 감정이 생기지만 오해도 생기고 그러는 거죠.

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오피스 로맨스]는 신선한 경험입니다. 일단 캐스팅부터 그래요. 이 영화는 미남미녀 캐스팅엔 관심이 없습니다. 아나톨리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동글동글한 얼굴의 안경잽이 중년 아저씨이고 류드밀라는 소련 공산당 중간간부처럼 생긴 아줌마예요. 물론 류드밀라의 경우는 후반부에 메이크업과 패션의 개선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엄청난 미녀가 되는 건 아니지요. 70년대 소련 직장 사무실에 진짜로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방식으로 서툴게 연애를 하는데, 이 현실적인 힘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물론 우리 같은 외국 관객들은 러시아 관객들이 잡아낼 수많은 디테일을 놓칠 수밖에 없겠지만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적인 공식을 통해 전개되는 영화지만 그래도 영화는 인위적인 장치들을 많이 버리고 있습니다. 음모와 거짓말이 판을 칠 것 같은 설정이지만 그보다는 주인공들의 현실적인 환경과 감정에 더 집중하고 있지요. 표준적인 로맨틱 코미디보다 두 주인공을 훨씬 인간적으로 존중해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코미디까지 준 건 아니고요. 특히 거의 난장판으로 끝나는 결말은 잘 잡았죠.

70년대 모스크바에 살았던 평범한 소련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해외 관객들에게 보다 유명한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와 비슷합니다. 두 영화 모두 당시 소련 사람들이 재수없어 하는 부류가 어떤 종류인지 보여주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그 재수없는 놈'은 서양물 먹고 돌아와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필립스사 카 스테레오를 자랑하는 유리가 맡고 있죠. 아나톨리와 류드밀라가 로맨틱 코미디를 하는 동안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창인 올가가 유리와 사랑에 빠지는 보다 진지한 이야기가 따로 진행되는데, 여기서 유리는 악역입니다. 사실 진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올가지만 러시아라는 나라에서 올가의 대책없는 행동은 자연스럽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죠.

러시아 사람들에게 [오피스 로맨스]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옛날의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입니다. 정보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세상이 평평해지기 이전의 러시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죠. 물론 전 당시 소련에 대한 향수는 없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출퇴근하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행렬을 보고 있으면 아련해집니다. 나라는 다르지만 '평평해지기 전'의 세계에 대한 향수는 나름 보편적인 것이죠.

2011년에 리메이크판이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오피스 로맨스]라고. 평이 많이 안 좋군요. 원작보다는 당연히 못하지만 원작팬들은 일단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잘생겼다고 불평. 이해가 가요. (15/03/15)

★★★☆

기타등등
모스필름 유튜브 채널에 전편이 올라와 있어요.
https://youtu.be/cmylNwnR9qQ
https://youtu.be/JPjr65ncLL8

감독: Eldar Ryazanov, 배우: Alisa Freyndlikh, Andrey Myagkov, Svetlana Nemolyaeva, Oleg Basilashvili, Liya Akhedzhakova, Lyudmila Ivanova, Pyotr Shcherbakov, 다른 제목: Office Romance

IMDb http://www.imdb.com/title/tt0076727/

    • 엄훠낫 이 영화 재밌게 보셨나봐요. 생각해보면 지금 시점에서 듀나님처럼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일은 전혀 아니에요. 페미니즘 얘기할때 <모스크바는 눈물을..>과 더불어 빠지지 않는 영화입니다. 예상하시겠지만 페미니스트, 반페미니스트 양쪽에서 극단적인 비판이 나오는데 그 이유야 상상하기 쉽죠. 그래도 여전히 러시아인들 다수는 '유쾌하고 따뜻하고 착한 영화'로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몇가지 덧붙이자면, 유리와 마찬가지로 류드밀라도 당시 러시아인들이 심히 '재수없어 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이 둘은 실체가 모호한 스테레오타입. 특히 반복해서 "미므라"라고 놀림받는 류드밀라는 직장에서 성공적인 여성동무 하면 떠오르는 온갖 편견이 완벽하게 물화된 경우에요. 미므라는 원래 칙칙한데다가 지루한 사람이란 뜻이지만 대개는 고학력의 똑똑한 여자들을 단 한 마디로 격하시킬때 쓰는 말. 제 생각에 이 영화의 특장점은 류드밀라와 유리처럼 대중이 놀려먹고 싶어하는 특별한 재수탱이들을 지극히 평범한 아나톨리와 올가랑 각각 짝지어놓고 베라같은 생생톡톡 캐릭터를 배치해서 매우 현실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낸 데에 있다고 봐요. 음 그리고 전형적 미남미녀 캐스팅은 아니지만서도 알리사 프레인들릭은 사람에 따라선 미인이라고도 하는 배우. 이 사람의 위치나 외모가 주는 이미지는 굳이 비교하자면 주디 덴치 정도요? '귀족적인 얼굴'라는 말도 꽤 듣는답니다.

      *여기까지 써놓고 요즘 젊은이들은 또 뭐라고 하나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재미있네요. 류드밀라의 변신 전 복장과 스타일을 추앙하고 심지어는 류드밀라를 소연방 최초의 힙스터라고 선언하는 짤들도 있어요ㅎㅎ 리메이크작은 배우들 생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눈과 귀가 썩는 느낌.
    • 알리사 프레인들릭은 같은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 먼저 봐서 사실 그렇게 못생겼다는 느낌은 아니에요. 이 영화에서도 분장이 워낙 노골적이니까요.
      • 아 배우들 자체가 아니라 역할 말씀하신 거였나봐요ㅠ. 프레인들릭이랑 미야코프 둘 다 연기를 소름끼치게 잘해서 제 눈엔 마냥 알흠다우시다보니 문맥을 좀 오해했어요.
    • 리메이크 결말은 어떤가요? 결말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 원작 마지막장면이 거의 그대로 재연된 후 뜬금없이 몇달전 상황이 요약되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얘기가 더 이어지는데요. 유리의 음모가 드러납니다. 나름 반전이긴 반전. 위에서 듀나님이 쓰셨듯이 "음모와 거짓말이 판치는 설정" 인데, 뭐 그거 자체가 나쁜 게 아니구요. 여기선 잘나가는 신용평가사가 무대여서 무리한 설정은 아니긴 해요. 문제는 작가들과 감독이 게을러터져서 인물들 포함 모든 것들이 유명영화 패러디 포르노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구요. 제일 어이없는 건 리메이크판의 아나톨리가 마초인데다가 좀 모자라기까지 하다는 거에요. 상상이 되십니까, 모지리 마초 아나톨리? 감상평들 대부분이 거의 울화통을 터트리는 수준인데 외국인 입장에서도 이해가 가요. 아무리 불리한 리메이크라고 하지만 해도해도 너무했음. 배우들은 참 열심히 한다는 게 느껴지지만서도, 스베틀라나...그 울버린에 나왔던 배우도 최선을 다하는 거 같은데 이 배우는 <팅커 솔져...>에서 가장 연기를 잘했던 거 같아요. 출연작 다 본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러시아어로 연기하면 꽝이네요. 유명 연극학교 출신이던데 아직 감독운이 없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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