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미 데들리 Kiss Me Deadly (1955)

로버트 올드리치의 [키스 미 데들리]는 미키 스필레인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인데,
원작은 번역이 된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A.I. 베제라이즈가 이 소설을
각색했는데, 이 사람은 원작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스필레인도 이 영화를 싫어했다고. 하드보일드 소설을 각색한 필름 누아르 고전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에요.
영화는 마이크 해머가 차를 타고 가다가 크리스티나라는 젊은 여자를 태워주면서 시작되는데,
두 사람은 곧 정체불명의 악당들에게 잡힙니다. 크리스티나는 고문을 받다 죽고 해머만
간신히 살아남아요. 탐정 면허를 박탈당해 총도 없는 (근데 미국에서 그런 게 총을
갖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나요) 해머는 만나는 사람들을 한 명씩 구타하면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해 갑니다. 그러는 동안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한 명씩 죽고 해머도
많이 다쳐요.
영화는 전체적으로 흐릿한데, 구체적인 사건이 진행된다기보다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관습이 몽롱한 상태에서 순서대로 나열된다는 느낌입니다. 영화는 주인공을
그렇게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아요. 분명 사건의 진상을 거의 밝혀내고 여자친구/비서인
벨다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아주 중요한 미션에 성공했으니, 이 영화의 해머를
무능하다고 할 수는 없는데, 그래도 이 모든 게 관습에 따라 생기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종 영화 속 해머는 초반에 죽었고
그 뒤 이야기는 앰브로스 비어스 스타일의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매우 50년대 영화예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험악했던
필름 누아르 세계엔 공산주의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들이닥쳤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미국 남자들의 내면은 점점 더 폭력적이고 추해지고요. [키스 미
데들리]는 지금 관점에서는 엄청나게 폭력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에
반영된 시대만의 느낌 때문에 많이 황량하고 불쾌해요.
베레라이즈의 각본은 원작에 그렇게 충실한 편이 아닙니다. 일단 원작은
마피아 이야기라고 해요. 하지만 그걸 다 버리고 수수께끼의 상자만
남겼어요. 여기까지 가는 스토리는 다 잊을 수 있고 솔직히 대부분 교체 가능한데,
상자 자체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안에는 뭐가 들었나요?
영화에서는 이게 핵폭탄과 관련된 무언가라는 암시를 흘리지만 결말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거의 판타지스러운 마법의 존재 같아요. 후반에 대사로 직접
언급되는 것처럼 진짜로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클라이맥스 뒤에 흘러나오는
그 음침한 사운드는 너무나도 수상쩍죠. [키스 미 데들리]의 세계는 영화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멸망했을지도 몰라요.
(24/12/20)
★★★☆
기타등등
1. 영화 속 마이크 해머는 가난한 이혼 탐정이면서 무지 비싼 차들을
몰고 다니는데 베레라이즈의 취미를 반영한 것이라고.
2. 엑스트라 역을 제외한다면, 클라리스 리치먼의 첫 영화 출연작입니다.
3. 많은 영화가 이 영화의 맥거핀을 오마주했는데,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펄프 픽션]과 [레이더스]지요.
이 영화 속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그 무언가는 [레이더스]의 성궤 안에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감독:
Robert Aldrich,
출연:
Ralph Meeker,
Albert Dekker,
Paul Stewart,
Juano Hernandez,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48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