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지금까지 웨스 앤더슨의 경력은 데뷔 이후 조금씩 조금씩 자신만의 스타일 왕국으로 파고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무덤덤한 유머나 괴상한 캐릭터, 좌우대칭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바틀 로켓] 때부터 있었지만 [문라이즈 킹덤]이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죠. [다즐링 주식회사] 때만해도 느슨하게 열려있는 인도라는 공간이 숨통을 열어주었으니까요. 지금 그는 작정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고 그와 함께 형성된 골수 팬들을 끌고 다니는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취향'이라는 단어 하나가 영화 선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합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 여정의 종착지와 같은 영화입니다. 늘 인공적인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추구했던 이야기꾼에게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중부유럽의 국가의 고급 호텔에서 벌어지는 모험담만큼 어울리는 것이 있을까요? 심지어 그 영화의 시대배경은 1930년대입니다. 주인공들은 당연히 모두 영어만을 쓰고요. 그것만으로 모자라 영화는 두 겹의 액자로 이야기를 꼼꼼하게 포장해요.

그 중 가장 뻔뻔스러운 선택은 영화를 1.37:1의 아카데미 비율로 찍었다는 것입니다. 상업영화를 그 비율로 찍는 것이 조금 걱정되었던 모양인지 다른 시대를 무대로 한 액자는 1.85:1과 2.35:1로 차별화하고 있어요. 1.85:1을 기본으로 하고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1.37:1 화면은 필라박스, 2.35:1 화면은 레터박스로 처리하고 있고, 1.85:1 화면은 필라박스와 레터박스 모두를 쓰고 있지요. 화면이 꽉 차는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입니다.

괴상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이치에 맞습니다. 일단 디지털 시대가 된 뒤로 1.37:1로 영화를 찍어 거는 것이 일반 극장에서도 가능해졌어요. 게다가 이 화면비율은 앤더슨의 스타일과 잘 어울립니다. 앤더슨처럼 화면 움직임보다 미장센을 중요시하고, 좌우 대칭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에겐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런 화면이 가장 좋죠. 많이들 큐브릭의 [샤이닝]과 이 영화의 유사점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샤이닝도 원래는 1.37:1이 되고 싶어하는 1.85:1 영화입니다. 액자에 사용되는 레터박스 2.35:1도 효과가 나쁘지 않지만 그냥 1.37:1로 밀고 가도 상관은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필라박스를 없앨 수 있고 좋았겠죠. 우리나라 대부분 상영관에서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아, 내용. 영화는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가 톰 윌킨슨이 연기하는 저명한 작가가 쓴 이야기라며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에서 주드 로가 연기하는 여행자는 지금은 쇠락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머무는 무스타파라는 남자로부터 옛날 이 호텔의 지배인이었던 무슈 구스타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그 이야기가 1.37:1로 보여지는 영화의 본론인 겁니다.

레이프 파인즈가 연기하는 무슈 구스타프는 전형적인 히치콕식 '누명 쓴 남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단골 손님인 마담 D가 죽고 무슈 구스타프는 유언에 따라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명화를 물려받게 됩니다. 하지만 마담 D는 살해된 것으로 밝혀지고 유족들은 그를 살인범이라고 고발하죠. 체포된 무슈 구스타프는 동료 범죄자들과 함께 탈옥하고 로비 보이인 제로의 도움을 받아 진범을 찾아 나섭니다.

무슈 구스타프에게 이 이야기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서스펜스 추리물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종종 상당한 강도의 스릴러로 흘러요. 잔인한 장면도 많고요. 하지만 영화의 1차 장르는 여전히 코미디입니다. 1930년대에 나온 수많은 장르 소설과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무슈 구스타프에게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이 이야기는 인공적인 장르 규칙 속에서 움직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모험담은 그가 종종 읽는 싸구려 소설책이 그런 것처럼 그가 속해있는 유럽 문화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문화는 30년대가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죠. 이 영화의 비극은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영화 속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 전체가 난폭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앤더슨의 스타일 속에서 이 이야기는 더욱 아련해집니다. 미니어처 모델과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까지 동원한 인공적인 세트와 미장센, 중부 유럽이라면서 앤더슨 식 현대 영어를 쓰는 주인공들은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미 사라진 세계의 인위적인 모방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니까요. 그것만으로 모자라 영화 특정 장면에 이르면 그 모방 행위 자체를 잔인하게 끊어버리죠.

여기에 아련함을 더하는 것은 주인공 무슈 구스타프가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요. 그는 자신이 유럽의 마지막 문명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그는 사실 잘난 척하기 위해 명시집을 암송하는 얄팍한 속물에 난봉꾼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와 동시에 약자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는 올곧은 인물이기도 해요. 이러한 장점들은 그가 거의 약점처럼 무의식적으로 노출시키기 때문에 더욱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영화의 결말이 단순한 형식적 결말 이상으로 보이는 것이겠죠.

거의 아카데미 시상식 참가자에 맞먹는 머릿수의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연기대결'을 벌일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레이프 파인즈, 토니 레볼로리와 같은 몇몇 소수들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부분 '웨스 앤더슨 영화 소도구'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낭비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들이 스타이고 그런 역으로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에 재미를 더해주니까요. 물론 배우들도 즐겼을 거고. (14/03/28)

★★★☆

기타등등
마담 D 역은 원래 앤젤라 랜즈버리에게 갈 예정이었답니다. 하지만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무대 공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문. 틸다 스윈턴이 잘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분장비가 추가지불되었겠죠.


감독: Wes Anderson, 출연: Ralph Fiennes, F. Murray Abraham, Mathieu Amalric, Adrien Brody, Willem Dafoe, Jeff Goldblum, Harvey Keitel, Jude Law, Bill Murray, Edward Norton, Saoirse Ronan, Jason Schwartzman, Léa Seydoux, Tilda Swinton, Tom Wilkinson, Owen Wilson, Tony Revolori, Fisher Stevens, Bob Balaban

IMDb http://www.imdb.com/title/tt227838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7612

    • 큐브의 [샤이닝]과 -> 큐브릭의 [샤이닝]과
    • 문라이트 킹덤이 아니고 문라이즈요.
    • 아아, 무슈 구스타프에 대해 설명하신 부분이 참 좋네요! 레이프 파인즈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인물도 연기할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감탄하며 봤어요(제겐 아직도 쉰들러 리스트의 악역 이미지가 강한 배우라서...ㅜㅜ). 한껏 기대하고 극장에 갔었는데도 기대보다 훨씬 더 예쁘고 풍성하고 신나는 영화였답니다:-)
      • 레이프 파인즈라면 그보다는 코가 없는 이름을 말 할 수 없는 그 사람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죠(....)
    • 앤젤라 랜즈버리가 했더라면 좀 더 귀여운 이미지가 더해져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 운이 없었던 건지,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뒤늦게 접했습니다. 이 영화가 처음이었는데요.
      그의 연출,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로열테넨바움까지 역주행을 했는데, 이렇게 멋진 감독을 놓치고 있었다는 게 아쉬웠고, 지금이라도 만났다는 게 기뻤습니다.

      그리고, 듀나님의 영화 리뷰, 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참, 그리고
      영화에서 '사과 든 소년' 대신 걸어 놓는 그림에 관심이 갔는데요.
      에곤 쉴레의 그림 같아 보였습니다.
      에곤 쉴레의 그림 목록에 없는 그림이지만(이유는 영화에 나오고요) 스타일은 매우 쉴레스러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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