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Exodus: Gods and Kings (2014)


성서 이야기로 시대극을 만드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들 중 상당수는 역사적으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죠. 신약의 최대 스타인 예수도 실존인물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없고 구약의 모세까지 가면 그냥 옛날 이야기입니다.

노아 이야기 정도라면 그냥 옛날 이야기려니 하겠는데, 모세의 경우는 그렇게 옛날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3천여년 전 사람이니 굉장히 옛날 사람이긴 하지만 그리스 신화처럼 이야기를 멋대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옛날은 아니에요. 문명국 이집트가 배경이고 우린 당시 이집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료가 엄청 많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거든요. [출애굽기]가 그냥 유태인들의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건 그 쪽에서도 제대로 연구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람세스 2세와 같은 분명한 실존인물 옆에 세운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과 람세스 2세에 대한 모욕이죠.

그런데도 리들리 스코트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만들었습니다. "죽기 전에 성서 사극을 하나 만들어보자"... 뭐, 이런 계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스코트 같은 감독이 한 번 해볼만한 장르니까요. 하긴 그는 [글레디에이터]로 오래 전에 망한 줄 알았던 그리스/로마 사극의 유행도 잠시 부활시킨 적 있습니다. 전 그 영화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이야기 자체는 우리가 아는 모세 이야기랑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한 때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사람을 죽이고 이집트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유태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켰다. 어쩌고 저쩌고. 물론 10개의 재앙도 나오고 홍해도 갈라집니다.

세실 드 밀의 [십계]와 차이점이 있다면, 스코트의 영화가 최대한 성서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노력은 모세라는 인물을 넣는 순간 박살이 나죠. 그래도 영화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최대한 줄이면서 모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세는 그냥 신을 봤다고 믿는 미치광이일 수도 있습니다. 10개의 재앙은 과학적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자연현상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홍해가 갈라지는 현상도 잘 하면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요.

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아브라함의 신의 묘사입니다. 스코트는 불타는 덤불과 굵직한 목소리의 성우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덤불은 남겨놓지만 성우를 치우고 대신 재수없는 영국인 남자아이를 신의 형상으로 등장시킵니다. 이 녀석은 생긴 것부터가 딱 학교에서 애들 괴롭히다가 교무실에 끌려나온 악동 같은데 하는 말이나 행동은 더 얄밉습니다. 노력하면 이것도 좋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전 이게 구약의 신에 대한 정확한 초상 같습니다. 적어도 [출애굽기]에서 벌어지는 잔인무도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대한 스코트의 알리바이 같아요. "난 이 재수없는 신이란 녀석의 살육엔 동조한 적 없다네."

이 영화가 그리는 모세나 유태인들의 묘사를 긍정적으로 볼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암만 봐도 모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광신자입니다. 유태인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신도들의 무리고요. 딱 요새 문명인들의 눈으로 본 IS 패거리 수준입니다. 영화 막판에 이집트인들은 떠나는 유태인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욕을 하는데, 보면서 참 신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꼴을 당했으면서 그 정도 선에서 멈추었다는 건 그들이 역시 문명인이었다는 증거. 보면서 지금은 개박살난 자스민 혁명 생각도 나더군요. 역시 민주주의와 혁명에서 종교는 그냥 독입니다.

근데 어디까지가 영화의 의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10개의 재앙만 하더라도 최대한 그럴싸하게 묘사하다가 결국 신비주의로 빠지니까요. 모세와 재수없는 영국인 남자애에 대한 영화의 태도도 왔다갔다합니다. 너무 많은 작가를 기용한 부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영화 자체가 분명한 의견이 없는 거죠.

사극으로서 영화는 괴상합니다. [출애굽기]와 실제 이집트를 엮느라 뻥을 많이 치긴 했지만 그래도 고증도 많이 하고 특수효과도 많이 써서 고대 이집트를 그럴싸하게 살려냈는데, 정작 배우나 연기, 대사에선 사극 티가 전혀 안 납니다. 일단 할리우드 백인 배우들에게 대부분 주연 자리를 줬죠. 게다가 이들의 대사는 그냥 3천년전 사람 같지 않아요. 어차피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찰턴 헤스턴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모두가 압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십계]의 세계가 예술적인 자기 완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신이 특수효과로 홍해를 가르더라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대충 그 이야기를 믿습니다. 하지만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보는 동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우린 그냥 어색 터지는 현대식 대사를 자신 없이 읊조리는 할리우드 배우들을 볼 뿐입니다.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괜찮은 토론거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이 리들리 스코트의 필모그래피에서 의미있는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이런 거 할 시간이 있었다면 그냥 [블레이드 런너 2]나 만들 일이지. (14/12/15)

★★☆

기타등등
영화 후반부는 공포스러웠습니다. 집을 떠났던 남편이 돌아왔는데, 친척들이라면서 손님을 40만명이나 데려왔습니다...


감독: Ridley Scott, 배우: Christian Bale, Joel Edgerton, John Turturro, Aaron Paul, Ben Mendelsohn, María Valverde, Sigourney Weaver, Ben Kingsley

IMDb http://www.imdb.com/title/tt152810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3377

    • 저도 후반부 그 장면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십보라는 생불이구나ㅎㅎㅎ 하구요.
      더불어 크리스천 베일은 백인티가 너무 나서 저렇게 세수를 안 하는 걸까도 궁금했습니다(...) 어차피 전 라틴계 백인이랑 중동인이라면 구분도 잘 못하지만요OTL
    • 그런데 분명한 역사속의 인물인 '람세스'와 엮여도 한참 엮인 모세의 이야기가 무려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구약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런 성경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이유는 뭘까요? 예수야 어느 작은 마을 이야기니 역사에 안등장해도 있었으려니 할 수 있지만
      모세는 너무 깊이 역사에 관여하고 있잖아요? 고대 역사에서 정말 3천년전이면 그리 옛날도 아닌데.
      십계는 대놓고 종교영화라서 기독교인에게는 매우 좋은 영화였지만
      엑소더스는 그냥 뭘 겨냥한 영화인지 모르겠더군요. 종교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지한 역사극도 아니고
      그냥 사이코 살인마같은 민폐캐릭터 모세를 주인공으로 한 겉멋들린 영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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