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5)


냉전시대 스파이 영화 중 단 하나만을 뽑아야 한다면, 그 영화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될 것입니다. 굉장히 좋은 영화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 영화는 '신화화된 냉전시대 스파이'의 완벽한 표준입니다. 이 영화 전후에도 좋은 스파이 영화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들은 대부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세워놓은 기준점의 어딘가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존 르 카레가 쓴 동명의 소설을 마틴 리트가 각색한 영화입니다. 알렉 리머스라는 영국 스파이가 스파이 조직에 포섭되어 동독으로 넘어갑니다. 그의 임무는 망명자로 위장해서 문트라는 스파이 조직의 핵심 인물을 파멸시킬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음모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럽고 복잡한 것이었습니다. 잠시 그의 연인이었던 도서관 사서 낸 페리가 이 사건에 말려들면서 그 더러움은 더 노골적이 됩니다.

르 카레와 리트가 만든 건 반 007 영화였습니다. 이 소설을 쓸 때까지만 해도 실제 스파이였던 르 카레가 제임스 본드의 판타지를 견딜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당시에 비슷한 목적으로 나온 수많은 소설들과는 달리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거의 완벽한 사실성 그리고 그 사실성을 그 이상으로 사실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는 신화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반 007의 목적을 제거한다고 해도 만만치 않은 무게를 갖고 있던 작품이었죠.

이 영화가 가장 훌륭한 르 카레 영화였던 이유 중 하나로는 이 영화의 스토리를 들 수 있습니다. 르 카레는 이후에도 훌륭한 스파이 소설을 썼지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만큼 영화에 완벽한 스토리를 만든 적은 없었어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소설들은 물론 좋은 작품이지만 스토리가 그렇게 잘 흐르는 편이 아니죠. 종종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길거나 툭툭 끊어져 있거나 꽉 막혀있습니다. 하지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완벽하게 흐르는 적절한 길이의 소설이고 이는 영화라는 매체에 기가 막히게 잘 녹아듭니다.

이 작품은 근사한 60년대 영국 영화이기도 합니다. 물론 감독인 리트는 미국인이죠. 하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이 영화의 흑백화면처럼 냉전시대 영국 스파이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를 영국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거의 없는 걸요. 물론 영화가 그린 동독은 007 영화와는 달라도 어느 정도 상상의 세계겠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가 그린 60년대의 신화적 사실성이 붕괴되지는 않습니다. 리처드 버튼이 초라한 소모품 스파이치고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연극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영화의 비극과 전형성이 더 완벽하게 구현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동시대의 작가와 감독이 시대 밑에 은닉되어 있던 비극성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스크린에 투사할 수 있었던 그 절묘한 타이밍에 만들어진 걸작입니다. (15/08/31)

★★★★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조지 스마일리는 루퍼트 데이비스가 연기했습니다. 그 뒤로는 제임스 메이슨, 알렉 기네스, 덴홀름 엘리엇, 게리 올드먼이 뒤를 이었죠. 소설에서와는 달리, 전 이들이 같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배우들이 다르기도 하지만 캐릭터도 달라보여요.

2. 제가 처음 본 영화는 아닙니다.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영화에 대한 것입니다. 두 주인공이 타고 가는 차 바깥의 풍경이 너무 가짜 같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이 나요. 리머스가 링크 사람들과 갔던 식당도 기억나고요.


감독: Martin Ritt, 배우: Richard Burton, Claire Bloom, Oskar Werner, Sam Wanamaker, George Voskovec, Rupert Davies, Cyril Cusack, Peter van Eyck, Michael Hordern, Robert Hardy, 다른 제목: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974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1647

    • 초등학교 시절에 해문 출판사 번역본을 읽었을 때는 결말 빼고는 좀 심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카를라 삼부작과 같이 산 페이퍼백을 읽어보니 생각이 바뀌었지요. 나이 때문인가...
    • 어머나 이 영화 리뷰 옛날옛적에 봤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착각이었네요. 어릴 적 봤을 땐 아이고 이렇게 지루한 영화가 또 있을까 했는데 머리 좀 커서 다시 봤을땐 이야기 분위기 다 좋았지만 리처드 버튼 특유의 그 풍선다발 에고로 지탱되는 과장된 연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씁쓸한 영화에요. 리메이크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영미권 감독 말고 토마스 빈터베르크가 영어 잘하는 북유럽 배우들이랑 만들면 분위기 좋을 듯.
      • 버트 랭커스터, 트레버 하워드를 거쳐 리처드 버튼에게 갔다고 하더군요. 랭커스터는 안 되었을 거 같고, 하워드도 괜찮았을 거 같긴 한데.
    • 올레TV 에서 찾아보니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라는 이름으로 무료영화로 있네요. 주말에 한번 봐야지..
      • 오! 보고 싶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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