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2016)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는 이미 2005년에 bbc에서 3부작 미니 시리즈로 각색된 적이 있지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각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작에서 가져온 좋은 부분들이 많이 빛난 작품이었습니다. 전 그 드라마 이후 일레인 캐시디와 샐리 호킨스의 팬이 되었고 골무를 음란한 눈으로 보게 되었지요.

원래 박찬욱은 [핑거스미스]의 시대배경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미니시리즈가 만들어진 걸 알고 포기했다가 무대를 30년대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일본으로 옮길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요. 다행이지요. 박찬욱이 빅토리아 조 영국을 제대로 다룰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요. 이런 식의 문화적 가지치기의 매력도 있고요.

이렇게 해서 나온 [아가씨]는 원작과 많이 다른 물건입니다. 1부까지는 꽤 그럴싸하게 닮았어요. 사기꾼 백작이 도둑의 딸인 숙희를 대저택에 사는 아가씨인 히데코의 하녀로 보내고, 숙희는 백작의 희생양인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고. 원작의 3부작 구조를 해체했던 미니 시리즈보다 더 충실해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2부부터 조금씩 다른 길을 가다가 3부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이야기를 짜맞추는 방식도 달라요. 영화는 원작보다 퍼즐 같죠. 1부에서 일부러 눈에 뜨이는 빈 부분을 보여주고 2부에서 그 부분을 채우는 식입니다.

결과물은 원작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온갖 음모와 반전이 난무하는 소설이지만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은 그 안에서도 늘 진지한 사람들이지요. 죄책감, 사랑, 고통, 증오, 분노의 무게가 모두 엄청나고 그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갑니다. 하지만 [아가씨]에선 모든 게 가벼워졌어요. 새로 추가한 반전 때문에 앞에 그려진 감정묘사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일단 두 캐릭터가 발전하고 성장하는 3부의 이야기 대부분이 날아갔으니까요. 멜로드라마보다는 케이퍼물에 가까워요. 유머도 늘어났고.

줄거리와 캐릭터를 보면 더 귀여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숙희와 히데코는 원작의 수와 모드보다 훨씬 정을 주기 쉬운 사람들이죠. 한마디로 팬픽 주인공입니다. 맘에 드는 길을 걷지 않는 캐릭터들이 갑갑해서 독자들이 직접 쓴 대안물 같달까. 원작을 읽은 팬들에게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굳이 그 귀여움과 거기에서 파생된 매력을 부인할 생각은 안 들죠. 생각해보니 팬픽으로 이야기를 넓힌다면 할 말이 많아집니다. [아가씨]는 팬픽이기도 하지만 팬픽과 팬픽독자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해요.

반대방향,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배경의 멜로드라마로 보았을 때도 이 가벼운 매력은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이를 위해 동성애라는 금기를 무심한 듯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숙희와 히데코 둘 중 한 명이 남자였다고 생각해보죠.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젠더와 민족주의에 얽힌 고정관념 때문에 불쾌해졌을 것입니다. 남자 둘이었어도 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자 둘인 경우는 사정이 다르죠. 한국 관객들에겐 아주 드문 경험인 것입니다. 한국영화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캐릭터에 이렇게 편안하게 감정이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신경 쓰이는 건 남자들의 존재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원작보다 남자들의 비중이 더 커요. 원작의 석스비 부인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거의 없어져 버렸고 원작의 크리스토퍼 릴리인 후견인 코우츠키의 비중이 높아졌죠. 이런 변형이 영화에 새로운 주제를 추가하긴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라는 사람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주죠. 이들이 영화 내내 대부분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들에게 클라이맥스를 내준 건 좀 심했습니다. 한국 영화가 종종 빠지는 함정인데, 자기 비하와 조롱이 심해지면 그게 어느 순간부터 나르시시즘이 된단 말이죠. 여자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선 여자들에게 클라이맥스를 주어야죠. 징징거리는 남자들이 차지할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소문도 무성했던 섹스신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단 1,2부의 섹스신은 스토리 전개와 어울리지 않죠. 두 주인공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고난이도의 체위를 서커스처럼 실연하는 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3부의 섹스신은 주제와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원작의 주제와도 그렇게까지 어긋나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맘에 안 들었고요. 그 흐름에선 주제가 뭐건 뭔가 다른 걸 보고 싶었어요. 이들에 대한 제 거부감이 감독의 'male gaze'와 연결된 것일까? 글쎄요. 따지고 보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섹스신도 이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여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주제에 대한 기계적인 접근법이 흐름과 캐릭터를 무시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의 섹스신은 좀 데칼코마니 같아요. 내용보다는 대칭성이 더 중요시되는.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영화를 살린 건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김민희의 나른한 우아함과 김태리의 귀여운 야생동물과 같은 이미지가 캐릭터에 착 달라붙었고 같이 붙여놓으면 호흡도 참 좋습니다. 짧게 나오지만 문소리의 카메오도 인상적이고요. 하정우와 조진웅의 경우는 그럭저럭 기본만큼 활용된 편인데, 문제는 캐릭터가 납작하고 기능적인 캐리커처인데도 눈치없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죠.

결론을 말한다면, [아가씨]는 박찬욱의 영화들 중 가장 가볍고 명쾌한 영화지만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작품입니다. 맘에 드는 부분과 맘에 안 드는 부분들이 착 달아붙은 채 섞여 있고 이들을 분리시키기가 쉽지 않지요. 블루레이에 수록될 수도 있는, 3시간이 조금 넘는다는 감독판 또는 확장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두 여자주인공의 비중만 어느 정도 늘어나도 아쉬움이 조금은 희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죠. (16/06/06)

★★★

기타등등
1. 같이 본 동행의 말을 들어보면 이 영화에서는 여자배우와 남자배우의 일본어 실력차가 크게 난다고 하더군요. 남자배우들 쪽이 많이 떨어진답니다. 어차피 김민희가 일본인으로 나오는 영화라면 굳이 이들 역으로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아도 되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이런 영화에 한국배우들만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배우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2. 송일곤의 [시간의 숲]에 나왔던 타카키 리나가 히데코의 어머니 역으로 잠시 출연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들 일본어 교정을 맡았다고.

3. 정하담 배우가 아주 잠깐 나옵니다. 대사 없는 엑스트라 수준이에요. 하녀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하녀 5.


감독: 박찬욱, 배우: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조진웅, 김해숙, 이용녀, 유민채, 이동휘, Rina Takagi, 조은형, 한하나, 다른 제목: The Handmaiden

IMDb http://www.imdb.com/title/tt401693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3519

    • 오타 신고: 고난위도->고난이도
      • 고난위도->고난이도->고난도
    • 굳이 한국 배우를 기용할 이유가 있나 싶습니다 정말...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단점. <곡성>의 경우도 그렇고 그런 역을 잘 해 낼 수 있는 일본 남자배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김민희도 선방하긴 했지만 더빙을 하든 일본 성우를 쓰든 좀더 일어에 신경썼으면 좋았죠. 외려 김태리가 일어가 자연스러웠고, 하정우나 김민희는 일어가 어색하면 캐릭터가 깨져버리는 역할인 만큼 코우즈키나 김태리보다 좀더 자연스러웠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 올해 본 영화 중에 장단점의 갭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영화
    • 저도 일본인 배우를 쓰는 편이 더 낫지 않았나 싶더군요. 김민희는 충분히 잘해냈지만... 히데코 같은 배역이라면 일본 여배우들도 욕심 낼 만하단 생각이 들어서.
    • [오타 신고] 대저택에 사는 아가씨의 히데코의 하녀로 보내고: 아가씨 / 아가씨인
    • 아무리 들여다 봐도 2부 이후로는 원작이 좀 더 맘에 들어요. 난 원작의 멜로드라마가 좋았다고!


      박찬욱이라면 '끌림'을 영화화 하는 게 더 어울릴 듯 합니다만.
    • 코우즈키와 백작은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거나, 일본인인 척하는 한국인이니 일본어가 어색한 것도 말이 되지 않을까요.
      • 정말 너그럽게 본다면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하정우 배역은 주변인들이 나고야 백작이라고 깜빡 속을 정도로 묘사되니 오히려 귀신같이 일본어를 잘해야 하는 역할이었죠. 그런 연기를 소화 가능한 배우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코우즈키는 일어가 좀 어설퍼도 말이 될 것 같네요.
    • 영화의 설정상 언어 문제는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양쪽 언어를 모두 잘 하는 배우를 쓰지 않는 이상. 백작은 한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잘 해야 하는 역이고. 히데코 역은 일본 배우가 맡았다면 듀나님이 본문에 쓴 것처럼 편안하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었을까 싶구요.
      • 222 게다가 김민희의 레이스 드레스와 기모노를 볼 수 없잖아요.
    • 전 핑거스미스 보다 아가씨가 훨씬 좋았어요. 역시 팬픽이라서 그랬구만, 하고 무릎을 치고 갑니다.
    • 성인이 될때까지 한국말만 할 줄 알았을(것으로추정되는) 두 조선인 남자의 일본말실력이 원어민 수준이라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다섯살때부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일어실력이 떨어지는 것 또한 교포분들의 한국말 실력을 보면 설정상 이해가능하지 않나요.
    • 그건 언어능력이라기보다는 발음, 억양, 액센트가 자연스럽나 차이인데, 곁가지 느낌이 듭니다. 실제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조선인 일본어는 좀 차이가 있었거든요. 하정우도 그럭저럭 했다고 저는 봅니다. 문소리는 진짜 잘 하더라고요.
      • 이태리는 현대 일본인이 쓰는 정극어투인데 나쁘진 않았으나, 디테일하게 보자면 현지인이 내지 않는 액센트를 간혹 내곤 했어요. (일본어에서 액센트는 중요해서, 강세를 어디 두냐에 따라 동음이의어는 뜻이 바뀝니다.) 뭐 이러면 너무 아는 척 한다 뭐라 하겠지만, 저는 배우들 모두 전반적으로 봐줄 만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배우도 많이 나왔으면 좀 버라이어티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이태리랑 묶으면 포르노 느낌이 많이 났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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