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길 잘했어 (2020)


최진영의 [태어나길 잘했어]는 거의 19세기 서구 아동문학처럼 시작합니다. 중학생인 주인공인 춘희가 엄마 아빠를 잃고 외삼촌네 집으로 들어오는 거죠. 그 집에 남는 건 천장이 낮아서 제대로 사람이 서지도 못하는 다락방. 춘희는 그 방에서 십여년을 보냅니다. 심지어 고등학교 2학년 때 외삼촌 가족이 아파트로 이사가고 홀로 남은 뒤에도요.

어른이 된 춘희는 여전히 그 집에 살면서 사촌오빠네 식당에서 쓸 마늘을 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목표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던 다한증을 치료할 수술을 받는 거죠. 그러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벼락을 맞고 쓰러진 뒤로 중학교 시절 자신이 보이는 거죠.

오즈의 모 영화가 떠오르지만 보다 씩씩한 제목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한국 독립 영화에서 무작정 씩씩할 수는 없죠. 주인공이 극복해야 할 암담함과 컴컴함이 먼저 나와야 합니다. 영화가 춘희를 다루는 방식은 그냥 사디스틱해요. 주인공을 아끼고 사랑하고 귀여워하기는 하는데, 그런 면을 강조하기 위해 계속 괴롭히는 것입니다. 초반에 다한증 때문에 학교 선생님에게 망신당하는 장면부터 좀 심하다 싶지요. 게다가 중반을 넘어서면 춘희가 자기 집인 양 지키고 있던 집이 팔려나갈 판입니다.

다행히도 영화는 이 암담함을 극복하는 설정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유머가 기대했던 것보다 풍부하고,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만난다는 설정도 무리한 판타지로 흘러가지 않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춘희는 아무리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엉뚱한 곳에서 넘어져도 결국 자신을 긍정하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무엇보다 귀여워요. 매우 한국 독립영화스러운 방향으로지만. (22/04/14)

★★★

기타등등
전주가 무대이고 전주에서 찍은 전주 영화입니다. 감독도 전주 출신이라고 하고.


감독: 최진영, 배우: 강진아, 박혜진, 홍상표, 황미영, 임호준, 김금순, 다른 제목: The Slug

IMDb https://www.imdb.com/title/tt1424687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9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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