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Jane Eyre (2011)


우선 예고편 이야기부터 할까요? 영화를 마치 19세기를 무대로 한 장르호러물처럼 포장한 공식 예고편은 그렇게까지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케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는 그렇게 막 나가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훨씬 정직한 각색물입니다. 불필요한 스타일의 과시로 산으로 가는 영화는 절대로 아니란 말이죠. 그래도 그 예고편이 재미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영화에 호러적 요소가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샬롯 브론테의 원작소설에도 있는 거죠. 후쿠나가는 오히려 원작의 호러적 장치들 상당 부분을 없앴어요. 그레이스 풀은 거의 엑스트라 수준이고, 로체스터 부인의 비중도 극히 작습니다. 전형적인 해머 영화식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클라이맥스도 굳이 재현할 생각이 없는 것 같고요. 이 정도면 오히려 이전 각색물들보다 덜 멜로드라마틱하죠. 


그렇다고 도전적인 면이 없는 거냐. 그건 아닙니다. 각본가 모이라 부피니는 아주 흥미로운 시도를 했어요. 세인트 존 리브스 파트를 앞으로 끄집어내 영화 전체를 액자구조로 만든 겁니다. 순수주의자들은 불평할지 모르지만 이건 효과적인 선택입니다. 이렇게 놓자, 세인트 존 리버스 파트는 불필요한 자리를 차지 하지 않으면서도 고유의 무게감을 유지하며 전체 이야기에 어울리는 데 성공했거든요. 이전 각색물들에서 이 파트는 늘 어색한 짐과 같았는데 말입니다. 


부피니는 제인 에어의 입장에서 세인트 존과 로체스터를 보다 분명히 대비하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이제 세인트 존은 제인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기독교 문화의 대표자가 되고, 로체스터에 대한 제인의 로맨틱한 감정은 주인공의 주체성을 완성하는 도구가 됩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세인트 존이 조금 더 재미있는 인물이 됐어요. 더 못난 인물이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루한 것보다는 못난 게 낫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로체스터가 더 나은 인물로 그려진 것도 아닙니다. 마이클 파스벤더의 로체스터에는 토비 스티븐스의 애교는 없어요. 오히려 그는 이전의 어떤 로체스터들보다 악당처럼 보입니다. 중혼범, 가정 폭력범, 사기꾼의 분위기가 농후하죠. 특히 결혼식 장면은 그냥 강탈처럼 보이거든요. 그렇다고 그가 매력없는 인물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는 오리지널 '나쁜 남자'예요. 한국 연예계에서 기성품으로 만들어내는 싱거운 가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컴컴함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바이런식 악당인 겁니다.


파스벤더의 로체스터와 비교하면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제인 에어는 훨씬 어리고 연약해보입니다. 제가 아는 제인 에어 배우들 중 가장 어릴 걸요. 하지만 우린 종종 제인 에어가 얼마나 어린 사람이었는지 잊는 경우가 많죠. 이 모든 일을 겪는 동안 이 아가씨는 아직 십대였잖습니까. 바시코프스카의 제인 에어는 우리가 제인 에어에게 기대하는 정신적 성숙함은 비교적 덜 갖추고 있지만, 그 때문에 상황과 더 잘 어우러지고, 또 그 역경 속에서 성숙해가는 과정이 더 잘 드러납니다. 


영화는 샬롯 브론테가 그리는 빅토리아 시대를 21세기의 윤리관을 통해 바라봅니다. 브론테 자신의 관점이 워낙 날카로웠으니 특별히 더하거나 뺄 필요는 없죠. 단지 강조할 부분을 지정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영화는 종종 영국 계급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꼼꼼하게 보여주고, 자기네들을 신심깊은 기독교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들이 얼마나 불쾌하고 추한 사디스트였는지를 보여주며 즐거워합니다. 세인트 존과 로체스터의 캐릭터를 새로 재단하면서 당시의 성역학을 분명히 묘사하기도 하고요.


완벽한 [제인 에어] 영화를 기대하고 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2시간의 러닝타임에 맞추기 위해 삭제된 부분들이 꽤 있는데, 그 선정은 조금 괴상합니다. 그레이스 풀과 로체스터 부인의 분량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죠. 이 영화에는 템플 선생의 비중도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곱슬머리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게 어색한 삭제라면, 후반부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이 보더라도 긴 소설의 다이제스트 삭제본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결혼식 장면은 너무 빠르고, 결말도 성급해보여요.


하지만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는 여전히 가장 좋은 [제인 에어] 각색물에 들어갑니다. 캐스팅은 멋지고 ("두 사람 모두 너무 잘 생겼어!"라는 비판은 무시합니다) 손필드 저택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고딕 로맨스는 이런 장르에서 필수적인, 거의 건축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습니다. 원작의 많은 부분을 잃거나 건너 뛴 건 사실이지만 그 빈 칸을 채울만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갖고 있고요. 원작을 대체할만한 멀티미디어본을 찾는 관객이 아니라면 이 영화에 충분히 만족하실 거예요. (11/04/13)


★★★☆


기타등등

아델이 가장 프랑스애처럼 나오는 영화예요. 심지어 이번 아델은 영어를 거의 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프랑스애려니하고 자막을 봤는데, 이름이 로미 세트본 무어. 엄마가 프랑스인인 이중언어 구사자라라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금 당황했죠.

 

감독: Cary Fukunaga, 출연: Mia Wasikowska, Michael Fassbender, Judi Dench, Jamie Bell, Sally Hawkins, Amelia Clarkson, Simon McBurney, Freya Parks, Romy Settbon Moore, Imogen Poots, Sophie Ward


IMDb http://www.imdb.com/title/tt122982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518

    • 이거 벼르고 있습니다.
    • 오호 생각보다 괜찮은 게 나온 모양이군요.
    • 객자구조 -> 액자구조
    • 헬렌 번즈의 머리카락 에피소드가 나온 게 제피렐리 판이었죠? 전 그 부분 볼 때마다 이상했던 게 원작에서 머리카락이 잘리는 건 헬렌도 제인도 아니거든요. 이름은 잊었지만 딱 그 부분에만 나오는 단역이었고 브로클허스트 씨의 막돼먹은(-_-)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어요. 영화에서는 제인의 격렬한 성격도 부각하고 둘이 매우 열렬(?)했구나 라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살짝 민망하다 싶어서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헬렌으로 나오는 영화에서도 그렇지 않았나요? 가물가물하네요. 확인해봐야겠어요. 일단 헬렌의 이름은 뺐습니다.

      아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헬렌은 곱슬머리가 아니었죠.
    • 세인트 존 리브스가 앞에 나오는 걸 보고 잠깐 놀랐는데, 영화가 진행되다 보니 2시간 짜리 각색물에 적합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손필드를 떠난 후 시간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에 좋은 방법이었어요. 제인과 로체스터의 나이 차이가 다른 영상물에 비해서 원작에 가까운 것도 좋구요.
      제인 에어를 읽지 않은 친구와 봤는데 영화 끝나고 몇부분은 설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버사의 오빠(맞죠?) 장면 등.
    • 샐리 호킨스는 뭘로 나와요 나오는지도 몰랐어요 ^^
    • 마지막 문단 후쿠나와 -> 후쿠나가 이겠네요
    • 확인해보니 44년판에 리즈테일러 곱슬머리 자르는씬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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