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병기 활 (2011)


밀리터리 덕후들의 오묘한 착각 중 하나로 근사한 무기나 탈것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왜들 그렇게 믿는 건지 이해는 가지만 정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건 인간들입니다. 무기나 탈것은 그들이 이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종종 그것들이 캐릭터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신체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 먼저여야 합니다. 무기를 먼저 내세우고 허겁지겁 영화를 만들면 [신기전] 꼴이 나죠.


김한민의 [최종병기 활]은 이 함정을 피해갑니다. 여전히 이 영화에서 활은 중요합니다. [신기전]의 신기전만큼이나 중요하고, 등장하는 장면은 몇 배나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활과 화살은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그 활을 들고 화살을 날려야 하죠.


이들이 엮인 드라마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와 자인은 아버지가 인조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려 살해당한 뒤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13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자인은 신랑인 서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갑니다. 남이는 자인을 구하기 위해 청나라로 뛰어들고 청나라 정예부대 니루를 이끄는 명장 쥬신타와 활의 전쟁을 벌입니다. 뻔할 뻔자 구출 플롯인 겁니다. 서부극에서도 자주 쓰였고,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드물지는 않을 겁니다.


이 드라마가 잘 짜여졌다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각본의 객관성이 부족하죠. 종종 영화는 민족적 울분에 먼저 휩쓸려 통제력을 잃는데, 그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갈 이야기가 종종 애국 신파에 쓸려갈 위기에 빠집니다. 드라마가 가장 많은 부분, 그러니까 병자호란에서부터 구출까지가 영화에서 가장 늘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최종병기 활]은 드라마가 짧고 액션이 긴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뛰고 달리고 쏘고 찌르는 영화예요. 액션이 본격적으로 물이 올랐을 때, 영화는 화끈하게 재미있습니다. 긴장감과 속도감은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요. (그리고 늘어진다는 중반 부분도 사실 그렇게 느리지는 않습니다. 후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죠.)


영화를 보면 활이라는 소재를 정말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이나 총보다 훨씬 영화적인 재료예요. 일단 고도의 지능대결입니다. 지형과 날씨와 같은 수많은 변주 속에서 도주하거나 맞서는 상대방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야 이길 수 있지요. 활과 화살의 조합 역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해서 서너 종을 섞어 쓰면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쫓고 쫓기는 단순한 액션인데도, 영화에서는 같은 액션이 반복되는 일이 거의 없어요.


호연지기가 넘치는 영화입니다. 액션이나 영화의 스타일도 그렇지만, 캐릭터에서도 그런 게 느껴집니다. 단순하고 꿋꿋하고 호탕한 인물들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온 몸을 바칩니다. 위에서 제가 애국 신파라는 표현을 쓰며 투덜거렸지만, 이들이 본격적인 액션에 도달했을 때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그들 사이의 대결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심지어 후반부에 가면 종종 청나라 군인들에게 감정이입하게 되는 부분들이 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출대상인 자인도 만만하게 당하고만 있는 청순가련타입과는 거리가 멀어요. 가만히 앉아 당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달리는 동안 종종 무리를 하기도 하고 삐끗하기도 합니다. 'CG 호랑이의 습격'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군요. 하지만 그런 장면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거나 지루한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질주하는 영화가 그런 삐끗함 없이 완벽하기만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잖아요. (11/08/01)


★★★


기타등등

1. 청나라 군인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모두 만주어를 씁니다. 종종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연기하는 배우들이 풍기는 어색한 긴장감 같은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미 만주어는 쓰는 사람이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사어. 다시 말해 영화 속 청나라 군인들을 보며 닭살 돋을 사람의 수도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죠.


2. 음, 청나라 군인들 중 한 명은 수화를 씁니다. 이게 말이 되는 설정인지 모르겠어요.


3. 설명용 자막은 민망하더군요. 특히 시간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중간에 넣은 자막은 한탄인지, 설명인지... 연도와 날짜만 빼면 없어도 될 것 같아요.

 

감독: 김한민, 배우: 박해일, 류승룡, 문채원, 김무열, 박기웅, Ryohei Otani, 다른 제목: Arrow, The Ultimate Weapon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Arrow_v__The_Ultimate_Weapon.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3084

    • 올해 한국 영화들은 정말 의외의 영화들(?)이 평이 좋네요.
      근데 제목을 왜 이리 오덕스럽게 지었을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 저는 자막 내용은 딱히 민망하다기보단 그저 사족처럼 느껴졌어요.
      다만 폰트가 심히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 개봉 전에는 바뀌면 좋겠는데요.

      수화 사용은 잘은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손짓으로 말을 전하는 방법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겠죠.
      원래 수화 사용자를 제대로 통역하던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내용의 엑기스는 파악 가능하지만 세부는 알아듣지 못하는 걸로 보이던데요.
    • 의외의 복병이 8월에 동시 개봉하네요. 재밌게 나왔다는 점에서 흥행에 청신호가 켜지겠네요.
    • 로이배티/ 그렇잖아도 저 제목때문에...

      '최종병기 그녀'+'주작의 활'이 생각났지요.ㅎ
    • 자본주의의돼지/ 저도 딱 그 연상이 되더군요.
    • 이 영화에 나오는 만주어가 민족문화연구원의 자문을 거친 것이더라구요
      보고서 놀랐습니다

영화 리뷰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454 터널 Địa Đạo: Mặt Trời Trong Bóng Tối (2025) 797 04-28
2453 리 크로닌의 미이라 Lee Cronin’s The Mummy (2026) 1 756 04-28
2452 살목지 (2026) 1 975 04-28
2451 제 98회 아카데미 상에 대해 몇 가지... 5 2,220 03-17
2450 호퍼스 Hoppers (2026) 1,679 03-12
2449 브라이드! The Bride! (2026) 1 1,610 03-06
2448 센티멘탈 밸류 Affeksjonsverdi (2025) 1 1,618 03-05
2447 아르코 Arco (2025) 1,200 03-03
2446 귀신 부르는 앱: 영 (2026) 1 995 03-02
2445 왕과 사는 남자 (2026) 2 2,028 03-01
2444 햄넷 Hamnet (2025) 1,401 02-28
2443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2026) 1,555 02-22
2442 휴민트 (2026) 1 2,458 02-13
2441 지느러미 (2025) 1 1,447 02-02
2440 솔 서바이버 Sole Survivor (1984) 957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