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 메이커 (2012)


페이스 메이커는 마라톤이나 수영 같은 경기에서 우승 후보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선수입니다. 영화를 보니 대충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겠더군요. 하지만 얼마나 그 역할이 중요한 것인지, 그 역할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큰 핸디캡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보도자료를 읽어보니 황영조 선수도 페이스 메이커였다는데요? 페이스 메이커로 뛰었다가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꽤 많은 모양입니다. 하여간 스포츠 멜로드라마 소재로는 이상적입니다.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한 보조 역할만 하던 주인공이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경기를 뛴다니 그 상징성만 해도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영화의 주인공 주만호는 (당연한 거지만) 페이스 메이커입니다. 사실 영화가 시작될 무렵엔 페이스 메이커도 아니죠. 그는 옛 동료의 치킨집에 얹혀 지내면서 월급 50만원 받고 배달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현역이 아니고 나이가 들었고 오른쪽 다리 상태가 나쁘며 뛰는 거 이외에는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다 그는 옛 코치인 박성일로부터 금메달 유망주 민윤기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는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주변 후배들이 그를 보는 눈도 그리 좋지 않고 그 역시 이전과는 달리 생각이 복잡합니다. 언제까지 그가 남을 위해서만 달려야 합니까. 마라톤 선수라면 30km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페이스 메이커]는 그 중 가장 쉬운 길을 택합니다. 신파죠. 한국식 신파.


주만호의 캐릭터만 봐도 이 영화가 갈 방향이 보입니다. 그는 한국 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바보 성자입니다. 머리 좋고 공부 잘 하는 동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는 어리석고 착한 형요. [천국의 아이들]을 흉내낸 어린 시절 회상 장면만 봐도 영화가 이 사람을 어떤 인물로 만들려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화의 설정상 언제까지 희생만 하는 인물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런다고 그가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아주 편리하게 조작된 멜로드라마의 도구입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친구들, 동료들, 가족들 모두 그의 캐릭터를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갑니다. 이러니 영화의 흐름도 조금 괴상해집니다. 주만호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그리는 우주의 중심이지요. 심지어 그와 친구가 된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 유지원에게도 그렇습니다. 이런 설정은 이야기를 수월하게 만들지만 정작 그러는 동안 주인공의 주체성까지 희박해져버리니 문제입니다.


영화가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심각한 옥에 티들을 지적하던데, 전 몰랐고 눈치채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멜로드라마의 재료로서 마라톤을 얼마나 잘 썼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갑니다. 한마디로 관객들의 감정을 쥐어 짜려는 의도가 너무 잘 보입니다. 아마 많은 관객들에게 먹힐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그냥 감정적으로 주인공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채, 시나리오 작가들이 이미 정해진 기성품 결말들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희미하게 궁금해하기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가 그리는 2012 런던 올림픽은 전혀 진짜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명민의 연기에 대해서 말하라면... 그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하고 잘 합니다.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의치를 끼고 외모도 바꾸고 몸도 만들었어요. 그가 캐릭터를 방치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명)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금 피곤해요. 영화 보는 동안 그의 연기를 인식하지 않는 순간이 거의 없으니 말입니다. 안성기는 언제나처럼 안성기이고, 고아라는 예쁘고 신선한데 김명민과 그렇게 억지로 연결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충 해도 될 텐데 너무 밀어붙이니까 아저씨들의 소망성취처럼 보여요.


[페이스 메이커]의 가장 좋은 점은 그 속도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골오골하고 뻔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주저하거나 속도를 잃지는 않죠. 후반부에서는 심각한 신파에 빠지지만 (빨간 우산 장면은 너무 심했습니다!) 중반까지는 어느 정도 흥미로운 객관성의 흔적도 보여요. 하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였을 거예요. 탈출구가 별로 없는 장르니까. (12/01/03)


★★☆


기타등등

김명민은 의치를 끼고 달릴 때 신기할 정도로 유재석 닮아 보여요.  

 

감독: 김달중, 출연: 김명민, 안성기, 고아라, 최태준, 최재웅, 조희봉, 이율, 이엘, 이봉주, 다른 제목: Pace Maker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Pacemaker.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3098

    • 저도 오늘 시사회를 봤는데
      김명민이 달리는 씬을 보면
      그 이상의 연기를 보여줄 수 없겠더군요..후반 장면들 보면서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다큐에서 마라토너 뛰는 장면을 보여줘도 김명민이 보여준 감동을 넘어서긴 힘들 듯..


      최근에 퍼펙트게임에서 포수가족 관련 부분이야말로 손발이 오글거려서 펴질 못했는데
      너무 뻔히 보이던 장면이였는데 결과적으로 포수 관련 부분에선 눈물이 찔끔 나더군요
    • 김명민은 드라마에 특화된 배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전작의 성공은 그에게 도움될 것이 없었고요.
    • 근데 드라마에 특화된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기에 말입니다

      보통 드라마판에서 스타로 떠오른 경우 영화판에서 버티는 걸 잘 못하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다시 드라판으로 오는 탑스타들이 꽤 있긴 하지만
      그건 연기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흔히들 영화는 감독예술이라고 하죠
      아무리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해도 두 시간 짜리 영화에선 감독 역량이
      작품의 질을 결정해 버린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김명민의 경우는 오히려 영화판에서 더 그 진가를 먼저 인정 받았죠
      소름이라는 영화로 말입니다
    • 소름에선 장진영에 묻히지 않았나요?
      그 주목도가.
    • 소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주목도를 따지면 장진영 케릭터가 더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김명민 또한 첫 충무로 입성이자 첫 영화 소름으로 신인상 감독상을 받았고
      첫 영화 연기로 제대로 인정 받으면서 충무로에 걸출한 신인 나왔다는 평을 받은 것이죠
      문제는 이후에 찍은 영화들이 아예 개봉을 못하고 엎어지고
      부상까지 당하면서 몇 년 슬럼프 겪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 드라마는 길어서 캐릭터가 중요할 때가 많죠. 별 내용 없이 캐릭터 빨로 몇십분씩 눙치기고 하는 것이 드라마니까. 김명민은 그 드라마에스 캐릭터를 살리고 역할의 주목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김명민의 능력이 필요한 영화면 언젠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겠죠. 딱히 영화와 드라마를 상반되는 개념하에 쓴 말이 아닙니다.
    • 김명민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소름의 연기를 넘어선 적 없죠. 적어도 영화에서는.
    • 내사곁에서 웃고는 있는데 눈물이 흐르는 장면이라던가 파리의 환상을 보는 장면
      파사의 엔딩 장면
      또 이번 페메의 마라톤 장면에서 김명민 표정 변화를 보면
      소름의 연기 보다 더 좋더군요

      단 영화는 감독예술이기에 감독 역량에 따라 영화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겠고요
      저도 소름은 작품적으로 아주 좋아합니다
      김명민이 누군지도 모르고 봤던 영화였는데 그 잔상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안 잊혀지네요
    •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영화 내내 (명)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감이 옵니다. 제 경우 이런 식의 연기는 취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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