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2012)


윤종빈의 신작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당연히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의 특별선언으로 시작된 '범죄와의 전쟁'에서 따온 것이죠. 영화 역시 노태우의 선언을 시작으로 부산의 폭력조직들이 와해되는 것으로 시작되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범죄와의 전쟁' 이벤트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열고 결말을 맺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 대부분은 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를 무대로 하고 있죠.

영화의 주인공, 그러니까 '범죄와의 전쟁' 때문에 유치장으로 끌려와 과거를 회상하는 최익현은 사실 완전한 조직폭력배는 아닙니다. 그 동네에서는 '반달'이라고 불리는 부류죠. 완전히 건달도 아니고, 완전히 일반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간. 비리 세관원 출신인 그는 해고 직전에 주인 없는 필로폰을 입수하게 되고 이를 밑천 삼아 뭔가를 해보려 하다가 부산 조직폭력배인 최형배를 만납니다. 그는 같은 종친이라는 이유로 최형배에게 달라붙어 '대부' 행세를 하면서 로비스트로서 서서히 자신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보통 이런 영화는 타락의 이야기가 되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민간인이 잠시의 유혹에 빠져 나쁜 친구를 사귀다 바닥까지 떨어지는 이야기요.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최익현은 조직 폭력배들과 손을 잡는다고 더 타락할 수 없는 종자예요. 이미 세관에 있을 때부터 바닥까지 떨어진 인물이니까요.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악당이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가 사는 세계의 룰에 의심없이 완벽하게 적응한 평범한 남자지요. 그리고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룰은 심지어 최형배로 대표되는 조직 폭력배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개판입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에서 유혹에 빠지고 망하는 쪽은 최익현이 아니라 그가 상대하는 조직 폭력배들처럼 보여요.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최익현이 없었다면 그들은 형님놀이하고 돈 뜯으면서 나름 평화스럽게 살았을 겁니다. 적어도 90년 10월 13일까지는.

영화가 들려주는 건 지하세계의 몇몇 예외적인 범죄자들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80년대에 장년층이었던, 그러니까 딱 감독의 아버지 세대인 한국남자들의 꼰대스러움에 대한 야유와 폭로지요. 영화를 보다보면 건달 세계와 일반인들의 세계를 가르는 뚜렷한 구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 같은 룰과 세계관을 따르고 있어서 구별이 어려워요. 시대와 세대의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 폭로는 보다 개인적인 의미를 띄게 되지요. 아니나 다를까, 시사회 끝난 뒤 간담회에서 감독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더군요.

영화는 작정하고 만든 코미디입니다. 아마 이 장르가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일 겁니다. '폼나는 건달들의 세계'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시도가 이 장르 안에서 계속 파괴되거든요. 물론 최형배를 연기하는 하정우와 같은 배우들은 모두 심각하게 폼을 잡으며 연기를 합니다. 그 심각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익현과 그의 주변인물들이 덜 우스꽝스러운 건 아닙니다. 그들은 자성의 능력이 없고, 한치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자기가 사는 세계의 비공식적인 시스템에 철저하게 종속된 딱한 무리들입니다. 그런 무리들이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웃고만 있을 수는 없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80년대 부산이 실제 부산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도 취재를 그렇게 상세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실여부와는 상관 없이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말투가 그럴싸하고 일관성이 있으며, 결정적으로 우리가 아는 한국 사회에 대한 지식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실처럼 느껴지는 세계죠.

배우들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들은 모두 얄팍한 캐리커쳐들이에요. 하지만 화려한 원색으로 그려진 재미있는 캐리커쳐들이죠. 단순한 스테레오타입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흐릿한 위장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저열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된 무리죠.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건 역시 최민식이지만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김성균, 김혜은도 만만치 않습니다. 검사로 나와 정반대의 방향에서 이들과 부대끼는 곽도원도 마찬가지고요. 배우들이 진짜로 자신의 역할을 신나게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작품의 일부로 녹아드는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12/01/22) 

★★★☆


기타등등

크레딧 중간에 TV조선의 이름이 나옵니다. 내용과 주제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컬하죠.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김혜은, 곽도원, 다른 제목: Nameless Gangster


IMDb http://www.imdb.com/title/tt208222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2540

    • 오랫만에 별 셋 반이네요.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요. 배우들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영화라는 말에 더욱 끌립니다.
    • 10년전 최민식이 전설적인 건달연기를 보여준 파이란이랑 비교해 보면 더 재미있겠네요
    • 역시.. 기대가 큽니다.
    • 호평이네요. 서울, 지방 모두 히트하겠군요. 기대됩니다.
    • 충무로에서 전통적인 "타락의 이야기"의 전형이 될만한 영화는 뭐가 있을까요?
      '파고'의 자동차 세일즈맨 같은 예가 금방 떠오르지를 않네요. 복수극이거나, 인생 망치는 정도를 넘어선 '악마'가 되는 예만 생각나고.
    • 이거 대박삘 나네요.
      다른 리뷰들도 보니깐 거의다 호평.
    • 듀나님이 별 셋 반을 주는 한국영화는 늘상 그 힘이 엄청난 영화들이었죠. 꼭 한 번 봐야겠네요.
    • 지금 보러 갑니다~♪
    • 경상도 사투리로 꼬장부리고 호통치는 게 리얼해서 많이 웃었습니다. 아 떠오르는
      친가 어른들.
    • 어제 봤는데. 최민식의 연기에 기립박수 치고 싶더군요.
    • 근데 문득 궁금한 거...필로폰 잃어버린 그 두 명...걔들은 조직에서 무사했을까요? 엄청난 걸 잃어버린건데....쩝...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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