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2012)


박범신의 [은교]는 저명한 시인인 이적요와 세 번째 소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의 제자 서지우, 우연히 그들의 삶에 끼어든 이웃집 소녀 한은교의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이 삼각관계는 소녀를 가운데에 둔 두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노시인을 가운데에 둔 두 젊은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이미 고인이 된 이적요의 회고록을 기둥으로 하고 서지우의 회고와 시인의 유언을 맡게 된 변호사의 수기를 중간중간에 끼워넣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서술 형식의 재미는 상당한 편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좋아하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정지우의 영화 [은교]는 다중 화자를 이용한 서술방식 대부분을 지워버렸습니다. 변호사의 관점은 사라지고, 모든 이야기가 연대기 순으로 전개되지요. 그 때문에 소설의 재미 상당부분이 날아가버렸는데, 그렇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좀 심심해진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영화는 소설의 내레이션을 대부분 버리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서술 방식 대부분은 시작부터 짐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전 이런 영화의 태도가 소설보다 더 성숙해보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이적요의 캐스팅일 것입니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당뇨병으로 죽어가는 노인이고 늙음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 정지우는 엉뚱하게도 박해일을 캐스팅해서 노역분장을 시킨다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공식적인 핑계는 "마음속에 여전히 청춘과 욕망이 있지만 껍데기만 늙어간다는 관점을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을 해서 표현하면 대단히 흥미로울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 이적요 나이의 배우들 중 투자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결과는 어떤가. 전 영화 보는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분장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분장이고, 박해일의 목소리 연기는 어색하고 가짜 같아요. 물론 분장한 젊은 배우로 아직 젊은 욕망을 표출해내는 건 하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지만 배우에게 매일 여덟 시간 동안 분장을 시켜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노인들의 욕망, 심지어 그들 마음속에 숨겨진 청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노인들입니다. 젊은이들은 그냥 흉내만 낼 뿐이죠. 이 영화에는 늙음은 없고 젊은 사람들이 본 늙음의 표현만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겐 이게 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니, 그게 좀 괴상하죠. 저에게 원작소설의 이적요는 연륜있는 노인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주름살만 생긴 70년대 문학청년 같았죠. 그의 독서 선택, 인용 버릇, 과시욕, 위악적 태도 기타등등을 보세요. 이것들은 종종 중2병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정지우가 이적요의 그런 면을 묘사하기 위해 박해일을 캐스팅했다면 그건 어느 정도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그게 의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영화로 옮겨지면서 가장 손해를 본 건 서지우의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엔 이적요의 핸디캡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지우는 이 남자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서스펜스 소설의 요소가 상당부분 날아가버린 걸 고려해보면 이 인물의 축소는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가장 격렬한 갈등을 겪는 인물을 이렇게 축소시켜 버리면 균형이 깨지지 않겠습니까? 특히 이야기가 맺어지는 후반부는 말입니다. 위에서 전 이 영화의 각본이 오히려 원작보다 더 성숙해보인다고 했지만, 서지우의 축소 과정 중 세 캐릭터들의 갈등과 욕망 상당 부분이 날아간 건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은교는 영화로 옮겨지면서 상당한 이득을 봤습니다. 우선 소설 속의 한은교는 그렇게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었죠. 불순물 하나 없이 오로지 늙은 남자의 욕망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거의 말하는 아이스크림처럼 보입니다. 소설은 변호사의 관점을 추가해 이 캐릭터를 어느 정도 객관화시키려 하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작가가 요즘 애들의 대사를 만들려고 온갖 유행어들을 총동원할 때는 민망할 지경이었죠. 하지만 영화로 옮겨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영화의 경우 아무리 주인공 시인이 소녀의 이미지를 통제하려 해도 육체가 있는 배우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정지우는 은교를 조금 더 생기있는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대사도 나아졌고 주체성도 더 뚜렷해졌죠. 모두를 만족시킬 수준은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개선된 겁니다. 게다가 캐스팅을 끝내주게 했죠. 정말 소설 속 은교는 김고은처럼 민간인스럽게 예쁘장한 보통 소녀였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이야기가 바뀌었습니다. 소설은 젊은이들을 질투하고 욕망하는 노인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노인과, 처음에는 노인의 뮤즈였다가 곧이어 독자가 된 소녀의 이야기로 변형시켰어요. 무게 중심이 옮겨갔고 마지막엔 젊은이에게 공이 넘어갔죠. 이건 오히려 원작보다 좋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지우의 캐릭터가 손해를 보고... 이러다보니 드라마가 약화되고... 이런 식으로 원작과 소설이 장단점을 꼬리처럼 무는 모양이 되어버립니다.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고 각자 눈에 뜨이는 장단점들을 갖고 있죠. 저에겐 영화 자체를 독립적으로 보는 것보다, 원작과 함께 비교해보면서 각색자의 독서 과정을 따라가는 게 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12/04/21) 

★★★

기타등등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음모노출과 섹스신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은교]의 섹스 장면이나 노출이 그렇게 화제가 될 만큼 자극적인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관객들은 그 정도엔 이미 익숙해져 있을 거예요. 이 영화의 노출이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극적인 단어로 조회수를 올리려는 기자들 뿐이겠죠.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고은, 김무열,  다른 제목: A Muse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A_Muse.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8295

    • 리뷰 기다렸어요. 원작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는데... 지금 예매해요!
    • 영화도 보고 원작도 봐야겠네요.

      "...작가가 요즘 애들의 대사를 만들려고 온갖 유행어들을 총동원할 때는 민망할 지경이었죠." 이 부분 정말 공감가는데요. 제 선배가 전에 만화 스토리 작가로 일할 때도 꼭 그랬거든요. 40넘은 중년부인이 10대 케릭터 만든다고 온갖 유행어들 집어 삼키는데 정말 민망이 대박이었거든요.-_-;;
    • /Bigcat 세대간의 언어나 세계관을 어색하기 않게 표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경우에도 40대의 또래 인물들 이야기는 척척 잘 표현했지만 정작 엄마의 나레이션은 평면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거든요.
    • ㅋㅋ 말하는 아이스크림...ㅋㅋ 영화 은교보고 정말 할말 많아서 왔는데..싹..다 잊고..듀나님의 저 말 한마디에..ㅋㅋ 근데 영화 세익스피어 인 러브? 거기서 찬란한 여름? 찬란한 계절? 그 대사가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그리고 오늘 쓰고 내일 다시보고 지우고..ㅎㅎ 왜그럴까..오늘 아침엔 이랬는데...ㅎㅎ

영화 리뷰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2454 터널 Địa Đạo: Mặt Trời Trong Bóng Tối (2025) 799 04-28
2453 리 크로닌의 미이라 Lee Cronin’s The Mummy (2026) 1 757 04-28
2452 살목지 (2026) 1 976 04-28
2451 제 98회 아카데미 상에 대해 몇 가지... 5 2,221 03-17
2450 호퍼스 Hoppers (2026) 1,680 03-12
2449 브라이드! The Bride! (2026) 1 1,611 03-06
2448 센티멘탈 밸류 Affeksjonsverdi (2025) 1 1,619 03-05
2447 아르코 Arco (2025) 1,201 03-03
2446 귀신 부르는 앱: 영 (2026) 1 997 03-02
2445 왕과 사는 남자 (2026) 2 2,028 03-01
2444 햄넷 Hamnet (2025) 1,401 02-28
2443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2026) 1,556 02-22
2442 휴민트 (2026) 1 2,459 02-13
2441 지느러미 (2025) 1 1,448 02-02
2440 솔 서바이버 Sole Survivor (1984) 957 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