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 (2012)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카피 제목이죠. 러디야드 키플링의 소설 [The Man Who Would Be King]을 각색한 존 휴스턴의 영화의 국내 제목이 [나는 왕이로소이다]였으니까요. 카피 제목이 난무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영화는 세종을 주인공으로 한 [왕자와 거지]입니다. 이 경우엔 [왕자와 노비]겠죠. 이 영화에 따르면 충녕대군은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세자로 책봉되자, 왕이 되기 싫어 명나라 사신이 오는 3개월 뒤까지 궁을 떠나려고 하는데, 궁으로 끌려온 아씨를 찾으러 온 노비 덕칠과 마주치게 되지요. 넘어져 기절한 덕칠의 옷을 입고 탈출한 충녕대군은 노비로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게 되고, 덕칠 역시 이 기회를 노려 정권을 잡으려는 신익의 음모에 말려들어 세자 흉내를 내야 합니다.

영화의 아이디어는 이해가 됩니다. 왕이 되려는 별다른 의지가 없고 계획도 없던 책벌레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었으니, 그를 그렇게 만든 무슨 일인가가 있었다고 치고, 그걸 상상하는 건 이야기꾼으로 해볼만한 일이었겠지요. 물론 따지고 보면 아귀가 안 맞는 것 투성이지만요. 영화를 보면 충녕대군은 왕이 되자마자 나라를 뒤집어 엎을 기세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아니잖습니까.

영화는 2시간으로, 코미디 영화로서는 다소 긴 편이지만, 이야기의 재료를 모두 담기엔 오히려 짧은 편입니다.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시리즈가 더 맞는 거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졌어도 여전히 무리수였겠지만 그래도 영화에 담겨 있는 코미디와 드라마, 역사가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을 찾았을 거라는 거죠.

지금 이 영화는 지나치게 단순하거나 복잡합니다. 세종이라는 인물을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려고는 하지만 정작 실제 인물의 무게에 눌려 이도 저도 못하는 신세지요. 실존인물을 가지고 신나게 놀고 싶지만 이미 만들어진 신화는 깨지 말자는 것이니, 결국 어색하게 놀다가 중간에 주저앉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충녕대군의 '각성' 장면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이브하게 흐르게 됩니다. 아무리 애국주의의 폭풍을 맞고 싶어도 그냥 믿음이 안 간다고 할까. 그건 중반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황희의 캐릭터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형적인 장규성 영화이고, 그의 전작들이 가진 단점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때깔은 안 좋고, 대사와 캐릭터, 음악은 불필요하고 어색하게 과장되어 있으며, 코미디와 감상적인 교훈이 충돌하지요. 캐스팅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습니다만, 충녕을 연기한 주지훈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전 그가 여기서 심하게 나쁜 연기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딱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영화에 맞는 연기를 했죠. 하지만 세종이라는 인물을 1인2역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린다는 계획을 세웠다면, 코미디와 다양한 인물 해석에 장기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뚱뚱한 책벌레였던 사람을 굳이 날씬한 꽃도령으로 만든 것도 신경이 쓰이고. (12/07/31) 

★★

기타등등
이미도가 세자빈으로 나와 코믹한 연기를 선보입니다. 잘 했는데, 그래도 소헌왕후의 앞날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코미디가 아주 편하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감독: 장규성, 출연: 주지훈, 백윤식, 변희봉, 박영규, 임원희, 이하늬, 백도빈, 김수로, 김소현, 이미도 다른 제목: I Am a King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I_Am_a_King.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2046

    • 전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먼저 떠올랐어요...
      ... 아무튼 이 영화 보러 영화관을 갈 것 같지는 않지만...
    •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whitebee1&folder=1&list_id=12468666
      하지만 진짜 저 제목의 원조는 홍사용 시인의 작품이죠. 20여년 전에 무슨 공익광고에도 패러디되었던 나름 유명한 시입니다. 아마도 국내 수입업자가 이를 알고 외화 제목을 새로 지어준 거 같네요.
    • 위대한 인물을 친근하게 만드는 방법은 그저 그를 찌질하게 만드는 것 뿐이었을까요? 팩션이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팩트에 전혀 기반을 두지 않은 픽션 주제에 역사의 진실 공개 운운하는 홍보멘트 보니까 민망함을 넘어 분노마저 치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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