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2012)


스티브라는 미국인이 바비라는 딸과 함께 한국에 옵니다. 그들의 표면적인 목적은 순영이라는 한국인 소녀를 입양해 데려가는 것. 하지만 순영은 정신지체인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남고 싶어하고, 대신 원래부터 미국 문화에 집착하고 있던 동생 순자가 언니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연결해준 순영의 삼촌 망택과 스티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끔찍한 비밀이 있습니다.

이상우의 [바비]가 영화 후반까지 숨기고 있는 이 비밀은 마땅히 스포일러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홍보물 자체가 스포일러를 공개하고 있으니 제가 굳이 감추어야 할 이유도 없겠죠. 스티브가 한국인 소녀를 입양하는 것은 바비의 병약한 동생 수에게 심장이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강한 기시감이 듭니다. 김수용이 이미 20여년전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려다 실패한 적이 있지요. 이상우는 2,30여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전 기억을 못 해요. 당시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아메리칸 드림]과 엮여서 상당히 강하게 기억에 남았을 텐데 말이죠. 하여간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 영화에서 개연성을 찾는 것처럼 무의미한 일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작은 딸의 심장을 얻기 위해 제물로 바칠 여자아이를 구하러 여행을 갈 때 큰 딸을 데리고 갈 것 같습니까? 말도 거의 통하지 않는 순영과 급속도로 친구가 되는 바비는 어떻습니까? 전 이런 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이 영화의 한국인들도 미국인들만큼 괴상합니다. 미국 문화에 집착하며 바비 인형처럼 되고 싶어하는 소녀 순자는 00년대에 태어난 한국 소녀와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죠. 오히려 오정희 연배의 원로 작가가 쓴 자서전적 소설에나 나올 법한 아이입니다. 언니 순영 역시 빈곤했던 과거를 미화해서 달콤하게 소비하는 복고 취향 연속극의 주인공으로 나올 법한 구식 천사입니다. 빈곤 계층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들의 꿈과 기대는 시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이상우는 이들을 진짜 세계가 아닌 추상적인 빈곤의 그림 속에 넣어버립니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스토리 그리고 극도로 선명하고 단순한 캐릭터 묘사와 행동 때문에 영화는 강렬한 동화적 퀄티리를 부여받습니다. 이야기의 잔인함은 오히려 그 동화적인 성격을 강화시켜줄뿐이죠. 하긴 원래 동화라는 게 잔인한 법이잖습니까. 그리고 만약 이상우가 사실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 등장도 못했을 캐릭터들이 이러는 동안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뭐든지 하는 작은 악마인 순자와 같은 아이는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이지만 그만큼 인상적이기도 하니까요.

거칠게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연기 역시 거칠어요. 한국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미국인 배우들은 제대로 연기 관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역 배우들은 요새 아이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와 행동 때문에 종종 애를 먹고요. 물론 보름 넘는 짧은 기간 동안 논스톱으로 질주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조금 더 섬세하게 관리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우는 그래도 이런 데에 대해 깊이 생각은 안 했을 것 같습니다.

[바비]는 투박하고 괴상하지만 인상적인 동화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동화는 감독 이상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을 투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개인적 경험이 과연 의미있게 보편화되어 현실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김새론 주연이고 마찬가지로 입양을 다루었던 우니 르콩트의 영화 [여행자]의 진실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것과는 정반대지요. (12/10/15) 

★★★

기타등등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세 번째 시리즈 중 한 편입니다. 당연히 무대인 포항을 어느 정도 매력적으로 그리는 것이 의무겠지만, 이 영화는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습니다. 보다 보면 포항이라는 도시에 정이 뚝 떨어질 지경이지요.

감독: 이상우, 출연: 김새론, 김아론, 이천희, 조용석, Cat Tebo, Earl Jackson, 다른 제목: Barbie

IMDb http://www.imdb.com/title/tt207433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5839

    • 원작으로 짐작되는 단편소설을 80년대 중반쯤 뿌리깊은나무(인지 아닌지는 아리송..)라는 잡지에 실렸던 걸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때 상당한 논란이 됐었죠. 아무리 미국이 싫어도 내용이 너무 무모하게 선정적인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고...그걸 실제 일어났던 사건으로 감독이 착각한 게 아닌가 싶은데요. 실제사건이라면 끔찍한 범죄 아닌가요?
    • 근데, 20년전에 이 소재로 영화화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했다, 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감독 자신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원작의 존재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거참 애매한 얘기네요...제 기억으론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던 거라면 기사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야하는데 미국쪽에서 그 소설내용때문에 항의했다는 기사는 읽은 적 있어요. 조선일보에 실렸던 걸로..모를 일이네요. 아무래도 이상;;
    • 리뷰 내용은 얼핏 혹평 같은데 별점은 또 후한 편이네요.
    • "김수용이 '이미' 20여년전에 '이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려다 실패한 적이 있지요." 이미가 두 번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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