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인범이다 (2012)


[내가 살인범이다]. [나는 살인범이다]가 아니라 [내가 살인범이다]입니다. 기자간담회에 가보니 배우들도 제목을 조금씩 헛갈리던데, 둘은 의미가 다르죠. 영화를 보면 감독/작가인 정병길이 굉장히 정직한 제목을 지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만.

영화의 아이디어는 많이들 한 번 정도 궁금했을 것 같은 상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나자 살인범이 나타나 자신이 진범임을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이를 위해 10명의 여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마와 그를 추적하는 형사 최형구를 등장시킵니다. 공소시효가 끝나는 2005년 어느 날, 그는 단골 술집에서 넋두리를 하다가 가면 쓴 살인마의 습격을 받습니다. 살인마는 그의 얼굴에 흉터를 내고 사라지지요. 2년 뒤, 이두석이라는 남자가 자신이 그 연쇄살인마라고 주장하며 회고록을 출판합니다.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두석은 미디어 스타로 떠오르지요. 과연 최형구는 그를 체포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중적인 의미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하나는 최형구가 법망을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보이는 살인마를 어떻게 처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괴상한 스토리에서 나옵니다. 도대체 이 영화는 이야기를 어떻게 매듭지으려고 하나? 과연 이 이야기에 이치에 맞는 설명이 주어질까?

진짜로 궁금한 건 물론 후자입니다. 위에 언급한 줄거리만 봐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소시효가 지나면서 살인범은 안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형사를 습격하고 술집 아줌마를 대상으로 살인미수를 저지릅니다. 2년 뒤 살인마는 이 모든 게 자기 짓이라고 고백하는데도 경찰은 그를 살인미수로 체포할 수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현실세계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정작 이야기의 가장 큰 트릭은 쉽게 밝혀지는 편입니다. 15분 정도 지나면 영화가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지 보이죠. 이를 깨닫기 위해 장르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단서를 줄줄 흘리고 있으니까요. 

그 15분 동안 위에 언급한 궁금증도 일부가 해결이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논리적인 해답을 통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냥 시들시들 의미를 잃어버리고 일부는 순전히 운에 기대고 있으니까요. 물론 상당부분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방치됩니다. 논리적인 추리물 같은 것을 기대하시면 엄청나게 실망하실 겁니다. 그냥 말이 안 되는 영화니까요. 물론 현실성도 없고요.

잡다한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 자체가 이미 알려진 기존 작품들을 대충 엮은 것 같아요. 보고 있으면 [살인의 추억], [26년], [악마를 보았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그와 함께 액션, 코미디, 사회물, 호러의 장르들이 비슷하게 난도질한 상태로 묶여 있지요. 이들 중 어느 것도 최상의 효과를 낼만큼 온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런 소재에서 기대할만한 불쾌함이나 분노도 느끼기 어려워요. 정서적으로 안전한 영화입니다. 그만큼 심심하기도 하죠.

가장 걸리는 것은 영화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지나치게 얄팍하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사법제도에 대한 상당히 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공소시효 이야기도 있지만 사적 심판과 사형에 대한 질문도 있지요. 모두 진지하게 다룰 법한 주제인데,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포탈 뉴스 기사의 답글 정도의 인식밖에 없습니다. 보는 동안 전 조금 화가 났습니다. 정의롭고 매서운 척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냥 비슷한 수준의 관객들의 구미를 들쩍지근하게 맞추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지요.

가장 좋은 건 액션입니다. 아마 정병길의 전작 [우린 액션배우다]를 보신 분들도 그걸 기대하고 가셨겠죠. 음, 오프닝의 액션 장면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형사 주인공이 총을 쏘고 쏘지 않을 순간을 완전히 반대로 계산하고 있어 갑갑하지만 리듬감과 액션이 상당하지요. 하지만 정작 본론으로 들어가면 기대는 흩어져 버립니다. 여전히 액션과 속도감은 있지만 거의 서커스나 마술 수준의 과한 설정과 억지스러운 트릭들 때문에 이런 액션에 필요한 최소한의 무게감과 심각함도 날아가버리니까요.  (12/11/01) 

★★

기타등등
1. 흔히 '빠순이'로 분류되는 여성팬들에 대한 한국 남자들의 노골적인 혐오와 경멸이 그대로 노출되는 영화입니다. 근데 동대문 메가박스의 시사회장에 몰려든 박시후 팬들을 보니 영화 속 장면과 자꾸 겹치긴 하더군요. 특히 간담회에서는 박시후 피부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는 '여성지' 기자도 있었는데... 말을 말죠. 근데 박시후 팬덤이 이렇게 컸었나요?


2. [우린 액션배우다]를 보신 분들이라면 반가울 얼굴이 보입니다.


3. 앞에서 제가 궁금해했던 프롤로그의 장면은 15년 전 회상일 가능성이 높군요. 하긴 그래야 말이 되지요. 하여간 나중에 보신 분들은 확인해주시길.

감독: 정병길, 출연: 정재영, 박시후, 정해균, 김영애, 최원영, 김종구, 조은지, 오용, 박웅, 장미자, 남정희, 민지아, 류제승, 장광, 다른 제목: Confession of Murder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Confession_of_Murder.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8790

    • 저도 오직 [우린 액션배우다] 때문에 기대하던 영화였는데……. 말씀하신 조각이 보이는 작품 목록 중에 아직 영화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26년]이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좀 생기긴 합니다만.

      정말 여담이지만 제목의 "나는"과 "내가" 이야기를 하시니 새뮤얼 풀러 감독의 [I Shot Jesse James]가 생각납니다. 이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나는 제시 제임스를 쏘았다]라고 번역되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내가 제시 제임스를 쏘았다]더라고요.
    • 그렇다면 첫번째 문장은 '배우들을' 헷갈리는 게 아니라 '제목(들)을'이 맞는 것인가요? @@;;;
      • '배우들도'라고 써야겠죠. 집에 돌아가서 반영하겠습니다. 지금은 모바일.
    • 패러디하기 딱 좋은 제목인 거 같아요.
    • 프롤로그 장면은 술집으로 같이 뛰어드는 걸로 보아 15년 전 회상 장면으로 보이더군요.
    • 은근히 헷갈리는 제목이네요 저도 나는 살인범이다로 계속 알고 있었어요.
    • 2005년 겨울 자막뒤에 나오는 최형구는 입옆에 흉터도 있고 아줌마도 목에 흉터가 있죠.

      15년 공소시효가 끝날무렵 최형구가 그술집에 들러 추억을 되새긴(ㅎㅎ?)것 같아요.

      액션이 정말 볼만했어요. 스토리는 엉성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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