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2013)


류승완에 따르면 냉전시대 베를린에서는 10명 중 6명이 스파이였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그 정보가 과연 의미있는 통계 작업을 거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그림은 그려집니다. 류승완이 묘사한 베를린은 제가 어렸을 때 하악하악거리면서 보았던 6,70년대 에스피오나지 영화 속의 베를린입니다.

류승완의 [베를린]은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자랐던 장르영화팬이 한 번쯤 만들어볼 법한 작품입니다. 배신, 음모, 망명, 암살과 같은 냉전시대 에스피오나지 이야기의 소재를 그대로 가져와서 주인공을 남북한 사람들로 바꾼 거죠. 기획만 보면 요새 종종 놀림감이 되는 CJ 짝퉁 블록버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가 달라요. 하나는 만드는 사람들이 장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고 그에 대한 애정도 깊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21세기에 냉전시대 에스피오나지의 공식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건 남북한 사람들밖에 없다는 것이죠.

영화의 무대는 베를린과 그 주변입니다. 베를린의 북한 비밀요원 표종성과 국정원 요원 정진수는 표종성이 연루된 불법무기밀매 현장이 노출되었을 때 처음 만납니다. 정진수가 표종성의 뒤를 캐는 동안 표종성은 통역인 아내 련정희가 망명을 시도하고 있다고 의심하죠. 여기에 김정일 사후 급변하는 북한상황이 끼어들면 전형적인 에스피오나지 영화의 공식이 만들어집니다.

전통적인 스토리입니다. 전통적인 설정이고 전통적인 캐릭터지요. 이야기는 복잡할 수도 있지만, 그 복잡함도 오래된 장르 부품 이상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류승완은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날 생각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하긴 그래야 이런 장르물의 세계에 한반도 사람들을 이식한다는 아이디어가 더욱 굳건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베를린]은 류승완 영화이기 때문에 액션이 강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냉전 스릴러의 영역을 떠나 [본] 시리즈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는 [하 슈프리머시]라고 농담하던데, 표종성을 연기한 하정우는 정말 몸으로 할 수 있는 온갖 일은 다 합니다. 정두홍 무술감독은 신났겠어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아날로그 액션을 할리우드 액션물의 도구들과 결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겁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할리우드 액션의 스케일과 과장을 갖추었으면서도 날것을 잃지 않은 그 어떤 것입니다.

배우들이 맡은 역할 자체는 단순합니다. 워낙 일들이 빨리 전개되니까 깊은 심리묘사나 성격묘사를 할 여유 같은 건 없죠. 그래도 그 안에서 하정우는 묵직하고 믿음이 갑니다. 연기의 재미는 암살자 동명수를 연기하는 류승범이 가장 많이 챙기고 있고요. 한석규는 예상했던 스타일로 야비합니다. 제가 가장 감정이입했던 건 련정희를 연기한 전지현. 아무리 액션 비중이 큰 영화라고 해도, 이런 식의 에스피오나지물의 공식 속에서는 총질하는 남자들보다 그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여자쪽을 더 주의깊게 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큰 단점은 영화가 의도한 국제적인 스케일과 영화에 반영된 디테일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류승완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모사드, 아랍 테러리스트, CIA가 결합된 거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만들어낸 베를린 첩보세계의 묘사는 그를 제대로 지지할 정도로 단단하지 못해요. 일단 영어 연기와 대사는 언제나처럼 문제입니다(특히 외국인 배우들과 영어 대사를 할 기회가 많은 정진수 역의 한석규는 애를 먹습니다). 연기도 문제지만 캐릭터나 배경이 한국인 작가/감독이 만든 모사품이라는 티가 나지요. 이게 그렇게까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13/01/22)

★★★

기타등등
요새 CGV에서는 스코프 비율의 영화를 상영할 때 빈 부분을 검은 천으로 가리지 않던데, 왜 그러는 건지 압니까? 불편해요. 어두운 장면에서는 스코프 비율 영화가 비스타 비율로 보인단 말입니다.

감독: 류승완, 배우: 하정우, 한석규, 전지현, 류승범, 김서형, 이경영, 다른 제목: The Berlin File

IMDb http://www.imdb.com/title/tt235737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9218

    • 하정우 먹방 있나요?
    • 집에서 밥먹는 장면에선 하정우와 전지현 모두 입맛이 없어 보이고, 앞에 길거리 음식 사먹는 장면이 하나 있긴 한데...
    • 입맛이 없어보인다니ㅎㅎㅎㅎㅎㅎ 빵터졌어요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개봉일에 극장에 가야겠네요
    • 저도 cgv 스크린 천으로 안 가려서 불편하고 신경쓰여요. 언제부터인가 안 가리기 시작했는데 추측으론 최상의 화면 비율로 보여주기 위해서? 위아래도 안 가리지만 화면비율에 따라 양옆도 안 가리더군요. 대형 모니터로 영화 보는 느낌이에요.
    • 맛 없게 먹는 하정우라니...
      류감독이 의도적으로 역으로 갔군요.
      먹방왕에게 실력발휘를 못하게 하다니...
    • "류승완에 따르면 냉전시대 베를린에서는 10명 중 6명이 스파이였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류승완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존 르 카레'의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에서 읽었다고 하는 군요
    • 어제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첫 상영으로 잘보고 왔습니다. 배우들의 연기가 참 좋았는데요, 특히 류승범의 외국어 발음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ㅎ 말씀하신대로 한석규씨는 애를 좀 먹은 듯 했지만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일단 20대가 넘어가면 나가서 산다해도 발음과 억양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액션은 훌륭했지만 의외로 폭파신은 실망스럽기도 했구요. 그런데 저만 느끼는 건가요? 너무 본시리즈 카피인 듯한 느낌이었는데.. 물론 캐릭터나 이런저런부분에서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전체적인 플롯은 동일한 것 같거든요. 속편으로 가는 동기도 그렇구요.
    • 저 역시 특히 마지막 장면은 본시리즈를 너무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해서 좀 찜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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