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지운

주연
이병헌....선우
김영철....강사장
신민아....희수
김뢰하....문석
황정민....백사장
문정혁....태구
김해곤....태웅
오달수....명구
이기영....오무성
진구....민기

선우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선우는 쾌락주의자인 나르시시스트입니다. 그가 자기 인생에서 원하는 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건드리지 않고 자긴 원할 때 세상에 굴러다니는 그 깔끔한 쾌락을 취하면 그만입니다. 그에게 삶은 멋진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데이트입니다.

조직의 중간보스라는 그의 직업은 그런 그의 삶의 방식과 완벽하게 어울립니다. 거느리고 관리해야 할 시스템이 있지만 일반 회사처럼 짜증나는 관료주의와 법규에 얽혀있지는 않죠. 수입은 노동량에 비해 많고 가끔 신경 긁는 녀석들이 있으면 직접 폼나게 패주면 그만입니다. 신경을 건드리지 않아도 가끔 해야 하는 폭력 행위가 스트레스 해소도 되어 주겠지요. 같은 세상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쾌락을 억누를 생각도 없고 스트레스가 쌓이도록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그에게 조금 귀찮은 명령이 떨어집니다. 보스의 여자친구 희수를 미행하라는 거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엔 약간 불편한 추가 명령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여자에게 남자가 생겼다면 여자를 제거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희수는 정말로 새 남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선우가 희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아마 호감 정도는 느꼈겠지요. 예쁘다고도 생각했을 거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하기엔 지나치게 자신에게 빠져있습니다. 사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에게 희수를 죽이는 일이 굉장히 싫다는 것입니다. 인근 조직의 애들을 패거나 죽이는 건 평범하고 종종 신나기도 하는 일상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조직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시민인 젊고 예쁜 여자를 죽이는 건 사정이 다르죠. 일을 처리하면 불쾌한 뒷맛이 굉장히 오래 남을 겁니다. 그리고 선우는 불쾌한 일은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선우는 희수의 일을 눈감아 줍니다. 나름대로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죠. 아마 뿌듯했을 겁니다. 아는 사람들만 입 다물어 준다면 다치는 사람도 없을 거고요. 자긴 별로 한 일도 없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괜찮은 선행을 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조금 들었을 겁니다.

그래놨으니 진상을 알아차린 보스가 그를 붙잡아 모욕주고 고문했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일단 창피하고 아픕니다. 게다가 억울해죽겠어요. 자기가 뭘 잘못했다고요?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멀쩡한 마누라 두고 딸만한 여자랑 놀다가 그 여자가 또 바람피웠다고 징징거리는 보스죠. 보나마나 선우는 보스의 이런 행동을 상당히 멸시했을 겁니다. 그처럼 깔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텁텁한 불륜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죠.

선우는 지금 최악의 상황과 마주쳤습니다. 창피함과 고통, 억울함은 모두 하나의 단어로 연결됩니다. 불쾌함이죠. 선우는 지금까지 이처럼 끔찍한 불쾌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선우의 논리에 따르면 이 모든 건 단번에 해소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일단 자신에게 고통과 모욕감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똑같은 걸 돌려줍니다. 그리고 보스를 죽이기 전에 도대체 왜 자기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설명을 들어야죠. 그는 정말 보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보스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보스는 선우만큼 단순한 사람입니다. 보스의 생각에 따르면 시스템의 항상성은 언제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진짜 중요한 건 시스템이 유지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유지된다는 사실이죠. 이건 애들 논리지만 대부분의 직업 범죄자들의 논리가 그렇습니다. 보스에게 선우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의 이익과 불쾌함이 더 중요하죠. 보스의 불쾌함은 결코 오래 남아서도 안 되고 비슷한 상황 속에서 반복되어서도 안됩니다.

네, 슬슬 설정이 잡혔습니다. [달콤한 인생]은 두 유치한 나르시시스트들의 전쟁입니다. 그들에겐 성인 남성이 마땅히 가져야 할 참을성도, 상상력도, 이해심도 없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때리면 그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세상에 주먹을 휘둘러 댑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신경쓸 바가 아닙니다. 이런 둘이 만났으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겐 들어줄 귀도 없고 이해할 수 있는 머리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건 떠들 입과 휘두를 주먹뿐이죠.

어떻게 보면 [달콤한 인생]은 감독의 전작 [장화, 홍련]과 거의 완벽한 거울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장화, 홍련]의 스포일러들을 늘어놓을테니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자진 퇴장하시길.) 두 영화 모두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루는 소재나 방법은 정반대지요. [장화, 홍련]이 여자들의 이야기라면, [달콤한 인생]은 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장화, 홍련]의 수미가, 자기가 타인에게 저지른 끔찍한 실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달콤한 인생]의 선우는 남들이 자기에게 가한 끔찍한 일의 흔적들을 처리하려 합니다. [장화, 홍련]의 드라마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면 속에 빠져 있다면 [달콤한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적 갈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외향적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의도적일텐데, 그렇지 않다고 보기엔 그 대비가 너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장화, 홍련]이 주인공의 고통에 진지한 드라마였다면 [달콤한 인생]은 남자들의 자기도취와 유치함에 대한 야유입니다. 어느 정도 자조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감독 자신이 그들이 누리는 쾌락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는 걸 감추지 않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요란한 폼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들이 몽땅 농담입니다. 아무리 진지하게 봐주려 노력해도 '몽땅 농담이야!'를 외치는 마지막 장면에 도달하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죠. 아마 전작 [장화, 홍련]이 어울리지 않게 너무 심각한 영화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의 컴컴한 농담들을 즐겼을 겁니다.

하지만 폭력과 복수의 대리충족을 기대하고 가는 관객들은 실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정도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이 영화엔 탈출한 선우가 복수를 감행하는 부분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거든요. 선우가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복수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스의 반격이 너무 미미하고 짧아요. 선우는 폭력을 휘두르며 서서히 닳아가지, 힘있는 반격에 거창하게 대응하는 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선우와 보스가 재회하는 장면이 나오면 많은 관객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뭐야, 벌써 끝나는 거야?" 쿨한 폭력 묘사를 기대한 관객들도 실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영화의 스타일은 폭력 묘사보다는 폼 자체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폼과 폭력 묘사는 대부분 늘 함께 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균형이 폭력보다는 폼에 기울어져 있지요. 물론 '얘네들 폼 잡는 장면들은 다 농담이야'라고 말하는 영화이니, 그런 식의 비율은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요.

[달콤한 인생]은 얄팍한 사람들에 대한 얄팍한 영화입니다. 당연히 그 얄팍함은 정곡을 찌르는 얄팍함이죠. 그 얄팍함은 꽤 재미있지만 그래도 많은 관객들은 덜 솔직하고 덜 정곡을 찌르더라도 더 진지한 폭발을 원하지 않을까요? 김지운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는 충분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전에 중단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인상이 재감상 때 바뀌게 될는지는 모르겠어요. (05/03/22)

DJUNA

기타등등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멜빌과 [킬 빌]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말하더군요. 저보고 말하라면 멜빌이 [킬 빌] 보다 힘이 세다고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