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파트릭 브라우데 Patrick Braoudé

주연
파트릭 브라우데....단
Patrick Braoudé....Dan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사라
Kristin Scott Thomas....Sarah
제라르 다르몽....시몽
Gérard Darmon....Simon
발레리아 브뤼니 테데쉬....미셸
Valeria Bruni Tedeschi....Michelle
잔느 모로....리브라
Jeanne Moreau....Libra

1.

패션사업에 종사하는 두 남녀가 파리의 란제리 패션쇼 장에서 눈이 맞아 콘돔 한 통을 다 쓸 만큼 요란하게 섹스를 했습니다. 자, 이제 선택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잘 놀았다!'하고 잊어버릴까? 아니면 조금 더 관계를 진척시킬까?

둘 다 후자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여자 주인공 사라가 꽃병에 남긴 메세지가 남자 주인공 단의 눈에 들어가기 전에 박살나면서 일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서로가 차였다고 생각하며 이를 박박 갈던 그들이 다시 같은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로 만나게 되면서 사정은 더 엉망이 되고요.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사라진 전화번호'라는 도구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엔 꽤 좋은 선택입니다. 적어도 영화의 전반부는 이 도구를 엔진 삼아 매끈하게 잘 흘러갑니다. 사라진 전화번호와 걸려오지 않는 전화로 인해 사라와 단은 그들의 짧은 만남과 그들이 지금까지 끌어왔던 삶과 인간 관계에 대해 되씹게 되고 그 장면들은 참으로 발전적입니다. 여기까지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화번호'는 영화 전체를 끌어갈 수 있는 엔진은 못됩니다. 둘이 어떻게든 만나서 "왜 전화 안했어요?" "왜 전화 번호를 남기지 않았어요?"로 말싸움을 시작하기만 해도 곧장 모든 문제는 해결되니까요.

따라서 영화의 나머지를 끌어가기 위해서는 그 전화번호를 제외해도 갈등 구조가 남을 수 있게 새로운 설정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영화 전체를 통해서도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라와 단은 아직 서로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안다는 것이 기껏해야 상대방의 세례명과 아파트 주소 정도 뿐이죠. 서로에 대해 이 정도만 알아 가지고는 제대로 된 '러브 스토리'를 끌어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후반부에서 이 부족함을 메꾸어야 하지요.

그런데 브라우데는 이 부분에서 가장 안이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갈등구조를 끌어들이는 대신 사라진 전화번호로 인한 오해를 영화 끝까지 연장했습니다. 그 결과 사라와 단의 싸움은 단지 오해에 따른 신경전에 불과하게 되고 그들의 전쟁은 다시 그 전화번호가 나타날 때 순식간에 종전 되어버리고 맙니다.

브라우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건 간에 그들은 여전히 처음부터 관계를 시작해야 할 타인으로 남아 있으니 '나는 섹스보다 사랑을 원해요' 같은 단의 대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반나절의 데이트 동안은 그냥 놀았을 뿐이고 회사에서의 그 긴 싸움 동안에도 서로로부터 도망다니느라 바빴으니 도대체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여유가 없단 말입니다.

3.

브라우데의 전작 [네프 므와]에는 그의 플롯을 제한할 수 있는 'D 데이까지 9개월'이라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치는 영화의 호흡을 조절해 줄 뿐만 아니라 목표까지 친절하게 설정해줍니다. 주인공 사뮈는 그 9개월 간, 자기중심적인 개인에서 '아버지'로 탄생하게 되지요.

슬프게도 [사랑과 혼란]의 단은 여전히 발전없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 그도 사뮈처럼 지나치게 많이 생각합니다) 영화의 플롯이 그를 이끌 수 있을 만큼 질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겨우 사라와 가진 첫 데이트입니다. 결국 영화는 그토록 갈망하던 과거로 돌아가는 원상복귀로 끝나고 그 긴 소란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립니다.

영화가 가장 창조적이 될 때는 단과 사라가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각자의 친구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개인적인 연애사'를 공적으로 노출시키는 예스러운, 그러나 대부분 먹혀드는 테크닉까지 섞여서 그런 부분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둘을 만나지 않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는 거지요.

4.

영화는 '혼란'이라는 이름의 란제리 회사를 무대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 재료는 배경 이상의 무언가가 되기엔 아무래도 약합니다. '란제리'라는 재료가 가장 적절하게 쓰이는 부분은 단과 사라가 마주치는 장면들이 아니라 속옷 모델들에 넋이 나간 단의 어벙한 사촌 시몽을 놀려대는 장면입니다. 나머지는 눈요기 이상의 큰 의미는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패션쇼 중에 란제리 쇼처럼 지겨운 게 없잖아요.

5.

파트릭 브라우데의 연기를 평하기는 아주 어려운데, 영화 속에서 그의 이름이 단이건 사뮈건 어디에서나 그냥 브라우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가 가장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다울 때는 완벽한 악센트를 과시하는 영국 중상층의 야무진 속물로 나올 때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사람이 프랑스 영화들에서 자주 선보이는 '파리의 영국인(이 영화에서는 미국인이지만)' 룩도 좋아하는 편이랍니다. 이 영화에서 스코트 토머스의 모습은 그런 캐릭터의 정점처럼 보였습니다. (97/05/14)

DJUNA

기타등등

참, 잔느 모로가 빨강으로 머리를 염색한 모습으로 잠시 나와요. 그리고 카렌 뮬더의 동생 사스키아 뮬더가 모델로 잠시 나오는데, 언니랑 똑같이 생겼으니까 금방 알아차리실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