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안병기

주연
고소영....세진
장희진....유연
강성진....양성식
박하선....정홍
유민....지하철 김모양
김규민....박 형사

지하철 김모양과 세진

전 안병기가 강풀의 [아파트]를 영화화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폰]과 [분신사바]로 이어지는 하향세만 봐도 그의 다음 작품이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짐작할 수 있었지요. 나중에 강풀의 원작 만화를 읽은 뒤엔 기대가 더 떨어졌습니다. 원작만화가 가지고 있는 풍성하고 거의 긍정적이기까지 한 정서적 흐름은 안병기와는 상관 없었어요. 그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정서는 늘 부정적입니다. 공포,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 짜증.

그러다 오늘 영화를 봤습니다. 좋았냐고요? 기대했던 것보다는 좋았어요. 하지만 전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이게 특별한 칭찬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분신사바]보다는 나았고 전체적인 느낌은 [폰]보다도 낫게 느껴졌어요. 발전일까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분신사바]에서 첫 번째 바닥을 쳤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었어요.

[아파트]의 설정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9시 56분이 되면 아파트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수상쩍은 상황에서 죽습니다. 맞은 편 아파트에서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기가 엿보고 있던 그 아파트 건물에 사는 긴 머리 여자를 살리려 하죠.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만화에서 주인공이었던 29살의 평범한 백수 남자가 30대 초반의 냉정한 커리어우먼으로 바뀌었어요. 만화의 복수 시점도 사라졌고 유머와 멜로드라마, 다른 초자연적 설정들도 사라졌습니다. 안병기는 '80퍼센트 정도'를 바꾸었다고 하더군요. 아주 정확한 대답은 아닙니다. '80퍼센트를 쳐냈다'가 더 정확해요. 안병기는 원작의 기본 설정만 가지고 아주 전형적인 호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다들 예상했다고요? 그랬겠죠.

그래도 영화의 시작은 꽤 좋은 편입니다. 새로 추가된 지하철 김모양 에피소드는 새로운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킵니다. 물론 그게 정말 해결되어야 할 무언가를 품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 안병기 영화치고는 대사도 어색하지 않고 캐릭터나 심리 묘사도 괜찮습니다. 고소영의 '차가운 커리어우먼' 스테레오타입은 얄팍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정서적 흐름은 꽤 잘 잡아낸 편이죠. 박하선이 연기한 고등학생 정홍과 같은 캐릭터도 날카롭고 냉한 느낌이 상당히 그럴싸하고요.

괜찮은 설정들과 장치들도 있습니다. '긴 머리 여자 귀신 꿈으로 관객들 놀래키기'는 오래 전에 약발이 닳았죠. 하지만 창밖 복도를 걷던 긴 머리 귀신이 거의 [루니 튠즈]식 영화적 비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과 같은 건 꽤 재미있습니다. 몇몇 가짜 단서들은 좀 짜증이 나긴 하지만 소개된 시점에서 보면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영화가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 모든 게 심심해집니다. 일단 미스터리가 문제예요. 강풀이 거의 초반에 폭로했던 첫 번째 국면 전환이 이 영화에서는 클라이막스의 반전입니다. 원작을 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짐작하고 있을 게 뻔한 비밀을 감추느라 영화는 온갖 따분한 짓을 다합니다. 이야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특히 이 부분에서 캐릭터 간의 정보 전달은 정말 사오정 수준이에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과거 회상 장면은 따분하고, 보다 강한 복수를 위해 도입한 새 악당 캐릭터들은 너무 도식적이고 인공적이라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 이르면 대사도 나빠져요. 곧장 말해 슬슬 안병기식으로 흐르는 거죠.

이쯤에서 우린 원작과 안병기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곧장 말해 좋은 건 대부분 강풀이 만들었어요. 안병기는 성공적인 원작에서 좋은 것만 취한 게 아니라 그냥 도식적인 호러 장르에 맞는 요소들만 골라 가져왔는데, 그래도 그 중 좋은 게 어느 정도 남아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안병기가 추가하거나 개조한 부분들은 대부분 원작보다 못합니다. 위에 언급한 악당들의 설정도 그렇고, 주인공과 긴 머리 소녀의 유대 관계가 절실함을 잃은 것도 그렇고, 인기있는 양성식 형사 캐릭터의 비중이 떨어진 것도 그렇고...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음새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가장 나쁜 건 공포 효과도 원작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강풀의 원작은 장르물로서는 상당히 헐렁한 편이었죠. 비교적 도식적인 설정을 안이하게 빌려 쓰고 있고 종종 이야기는 다른 장르나 방향으로 빠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친숙한 장르도구들이 그 한가한 흐름 속에 작정하고 뛰어들 때 효과는 배가 되었습니다. 딱하게도 안병기는 이 모든 걸 진지하게 정통적인 호러로 다루고 있어요. 콘트라스트가 떨어지는 건 당연하죠.

자,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미 관객들은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여자 귀신을 보고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효과도 안 사는 걸 알면서 왜 그걸 계속 고집하며 정통적인 호러를 만들어야 하죠? 원작의 절절 흐르는 연민의 감정을 절반만이라도 간직했다면 영화의 밋밋한 클라이막스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았겠어요? (06/06/29)

DJUNA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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