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허진호

주연
한석규....정원
심은하....다림
신구....정원의 아버지
오지혜....정숙
이한위....철구
전미선....지원
권혜원....효정

정원과 다림

[8월의 크리스마스]는 간단명료한 예술적 결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시한부 인생 이야기를 다루면서 눈물짜는 감상주의를 모두 제거하는 것 말이죠.

생각해보면 이건 시한부 인생 이야기를 눈물짜는 감상주의로 그리는 것만큼이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정입니다. 한 번 뒤집기 이상은 아니니까요. 어느 쪽이 특별히 더 옳다고 할 수도 없어요. 눈물짜는 멜로드라마에는 그만의 장점이 있고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영화에도 자기만의 장점이 있으니까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목할 건 이 영화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비교적 낭비없이 효과적으로 활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는 한마디로 품위있게 죽고 싶어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 정원은 살 날이 몇 달 남지 않았지만 워낙 깔끔한 성격 때문인지 주변사람들을 귀찮게 하거나 추하고 약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미소 띤 가면을 쓰고 어느 때처럼 조용히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 비디오 플레이어를 틀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안내문을 쓰는 것처럼 자신이 죽고 없는 미래를 준비하면서요.

그런 정원의 삶에 주차단속원인 다림이 뛰어듭니다. 사진사와 단골 손님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천천히 우정으로 변해가고 그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정원과 막 자기만의 삶을 시작한 다림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짧게 끝날 수밖에 없죠.

영화의 주제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거의 교과서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모범적입니다. 갑작스럽게 단축된 주인공의 짧은 삶 속에서 우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정원이 죽을 때까지 간직한 마지막 사랑을 통해, 우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물론 찰나의 순간을 종이 위에 고정시키는 사진사라는 직업도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메타포로 거의 완벽하게 기능합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일상의 소소한 요소들과 감정들을 시한부 인생의 멜로드라마에 적절하게 결합시키는 허진호의 스타일입니다. 비디오 사용법이나 영정사진 찍기와 같은, 얼핏 보기엔 지극히 산문적으로 느껴지는 에피소드들은 시한부인생이라는 설정 속에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게 결합되어 조용하고 나른한 시를 만들어내죠. 물론 이런 삼가말하기의 테크닉을 조심스럽게 깨트리는 감정의 폭발들을 삽입하는 리듬감 역시 주목할만합니다.

한석규와 심은하라는 배우들도 이 영화에서는 좋습니다. 연기를 특별히 잘했다기보다는 배우들이 잘 활용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거예요. 허진호는 두 배우들에게 특별히 기교를 내세우는 대신 제한된 표현폭 속에서 절제된 일상의 루틴을 그려낼 것을 요구합니다. 덕택에 설정과 캐릭터가 과장되면 될수록 설득력을 잃는 이 배우들의 단점들이 거의 완벽하게 가려집니다. 특히 심은하는 말이에요.

아직도 전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는 [봄날은 간다]를 더 좋아하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저에겐 [8월의 크리스마스]는 설정부터 너무 멀끔한 영화처럼 보여요. 완벽하게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서 오히려 믿음이 안 가는 거짓말쟁이처럼요. 비슷하게 절제된 스타일 속에서도 떠나가는 애인에게 대책없이 매달리는 [봄날은 간다]의 상우 같은 캐릭터가 저에겐 더 잘 먹힙니다. 심은하의 영화를 하나 고르라고 부탁을 받아도,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한 이 영화보다는 거칠고 종종 어색하지만 배우의 노력이 더 많이 반영된 [미술관 옆 동물원]을 고를 거고요.

그러나 아무리 지나치게 멀끔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8월의 크리스마스]가 주는 서글픈 여운과 교훈을 무시하고 지나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여운에는 결국 자신의 삶을 추하지 않게 마감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주는 안도감 역시 섞여 있겠지만요. 정원은 참 운좋은 사람이었어요.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해피엔딩도 찾기 쉽지 않죠. (04/05/24)

DJUNA

기타등등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