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앤드류 니콜 Andrew Niccol

주연
에단 호크....빈센트 프리먼/제롬 모로
Ethan Hawke....Vincent Freeman/Jerome Morrow
주드 로....제롬/유진
Jude Law....Jerome/Eugene
우마 서먼....아이린 카시니
Uma Thurman....Irene Cassini
알란 아킨....휴고 형사
Alan Arkin....Detective Hugo
고어 비달....조셉 국장
Gore Vidal....Director Josef
잰더 버클리....라마
Xander Berkeley....Lamar
어네스트 보그나인....시저
Ernest Borgnine....Caesar
제인 브룩스....마리
Jayne Brook....Marie
엘리아스 코테스....안토니오
Elias Koteas....Antonio
메이슨 갬블....젊은 빈센트
Mason Gamble....Younger Vincent
빈센트 닐슨....젊은 안톤
Vincent Nielson....Younger Anton
채드 크라이스트....빈센트 아역
Chad Christ....Young Vincent
윌리엄 리 스코트....안톤 아역
William Lee Scott....Young Anton

1.

가끔 심심풀이로 역사책을 읽노라면, 과학이 얼마나 쉽게 미신과 영합하는가를 알게 되어 놀랄 때가 많습니다. 우생학, 사이비 통계학, 사회 '과학'이라고 자칭하던 수많은 판타지들... 이런 것들을 보면 과학이라는 것을 과연 믿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지요.

순전히 과학 탓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끌어왔던 여러 우행 중 최근 사례일 뿐입니다. 주도적인 사상과 이론은 언제나 일반화된 미신을 변호합니다. 과학이 지금처럼 주도적이지 않았을 때는 종교가 그 역을 수행했지요. 지금도 인종차별의 근거로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언젠가 통신망에서 그런 치들 중 몇 명을 만난 적도 있으니까요.

[가타카]가 그려내는 미래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영화의 세계에서 유전공학과 우생학은 이미 과학을 넘어선 미신입니다. 고도의 테크놀로지가 개입되었다고 미신이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테크놀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은 이웃일 뿐입니다.

2.

빈센트 프리먼(에단 호크)은 그런 비합리적인 미신의 피해자입니다. 그 결과 급조된 하층 계급으로 뚝 떨어진 그는, 똑똑한 하층 계급의 야심가들이 많이들 그러는 것처럼 옆길을 찾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남의 유전자를 이용하는 '빌린 사다리'라는 방법이 그 옆길입니다. 그는 브로커를 통해 반신불수가 된 영국인 수영선수 제롬 모로(주드 로)의 아이덴티티를 빌려 우주비행사가 되려는 꿈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빈센트의 방식이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저희는 영화가 끝난 뒤에 그 브로커가 정부의 하수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답니다. 사실 성공적인 어떤 계급사회도 순수한 계급 차별만을 고수하는 바보 짓은 하지 않습니다. 어디든 옆길이 있기 마련이지요. 몇몇 똑똑한 정부는 그런 옆길을 일부러 이용하거나 장려하기까지 합니다.

[가타카]의 세계에서도 그런 비밀스러운 정책은 꽤 유용할 겁니다. 각 개체의 유전자 조작이야 저희가 알 바 아니지만, 전체 유전자 풀 안에서는 언제나 약간의 예측불가능한 변이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사회적 억압이 '신의 아이들' 중에서 쓸만한 개체들을 뽑아내는 선별도구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요.

3.

제롬 모로가 빈센트 프리먼보다 더 흥미진진한 인물로 보였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빈센트와 제롬은 모두 자신을 거부한 숙명과 싸우는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빈센트의 투쟁은 도식화되어 있고 기존 사회의 구조 안에 몰래 스며들려는 그의 의도 자체도 그렇게 적극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의 투쟁은 강한 긴장과 스트레스, 공포, 육체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가타카]의 세계에서는 그런 잠입이 늘 일어날테니 차별화가 그렇게 되어 있다고도 할 수는 없지요. 이미 브로커까지 있고 그런 행위에 대한 별명까지 붙어있으니 말 다했지 않아요?

한가하게 휠체어에 앉아 가끔 주정이나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제롬은 그보다 더 재미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미래를 운명에 의해 거부당한 뒤 타인을 통해 그 위치를 복구하려는 그의 행위는 아마도 덜 교훈적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수함과 비극적인 요소는 빈센트의 그것을 예전에 넘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이중나선을 닮은 나선 계단을 양팔로 힘겹게 올라가는 근사하고 시적이기까지 한 은유까지 부여받고 있지 않나요! :-) 게다가 빈센트의 성공 이후, 자신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그 철저함이란!

하여간 빈센트와 제롬은 거의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식이라고 할 밀접한 관계로 맺어지는데 이 부분은 꽤 흥미진진합니다. 빈센트와 아이린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대신 이들 둘의 관계에 더 신경을 썼다면 훨씬 집중력이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제롬과 아이린을 조금 더 만나게 해서 비틀린 삼각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도... 으으 그만 두죠. 아주 잘 다루지 않으면 신파가 되고 말테니까요.

4.

앤드류 니콜의 각본과 연출은 비교적 평이한 편입니다. 맘만 먹으면 정말 몸이 저릴 정도로 서스펜스를 연출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상당히 태평입니다. 아마도 그는 일반적인 서스펜스물보다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그의 결정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가 [가타카]가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느 정도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인 극적 테크닉보다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가타카]의 SF적 순수함입니다. 특수 효과를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SF 분위기가 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상당한 SF적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가타카]가 고도의 하드 SF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SF라는 장르에 아주 친숙한 작가가 썼다는 느낌이 묻어 있습니다. 우선 이 영화에는 "난 유전 공학을 다루고 있어! 난 유전 공학을 다루고 있어. 내가 얼마나 거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나 봐!"라고 허풍떠는 순진함이 없습니다. 은밀하지만 상당히 흥미진진한 디테일로 가득하고요.

지금은 너무 인용되어서 거의 노골적이 된 느낌이지만 그 나선 계단의 사용도 대표적인 예지요. 남자 친구와 키스한 뒤 유전자 검사를 받으러 가는 여자들, 손가락이 12개인 피아니스트, 크레딧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들 중 A, T, G, C만을 강조하는 트릭(아시겠지만 이 글자들은 DNA를 구성하는 염기인 아데닌, 티민, 구아닌, 사이토신의 머리글자입니다. 제목이자 무대인 '가타카'도 이 글자들로 구성되어 있고요) 등등...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간단한 흑백논리와 단순한 '인간 정신의 승리(?)'로 끌어가지 않으며 중도를 유지하는 그 절제력입니다.

5.

SF 영화에서 미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특수효과가 아닌 시각적 인상입니다. 다시말해, 인테리어 디자인이 특수효과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말이지요.

[가타카]의 시각적 요소들은 미래세계를 다룬 다른 SF와 많이 차이나지는 않습니다. 청결함과 비인간적인 질서는 이 장르의 흔한 클리셰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요소들에 강한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세포 한 조각만 잘못 흘려도 주인공이 파멸하는 상황이니까요.

전체적인 시각적 인상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제한된 예산으로 미래 세계를 구현하는 그 트릭들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나오는 전기차들이 다 어디서 나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그 밖에도 태양열 발전소와 같은 기존 시설을 이용한 미래적 느낌 조성도 그럴싸한 방법이지요. [쥬라기 공원]을 만들 능력이 없는 나라라면 이런 트릭에 관심을 쏟고 본받는 것도 생산적인 일이겠지요.

6.

가장 좋았던 배우는 주드 로입니다. 제롬이라는 인물의 강한 성격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이런 인물을 센티멘탈리즘이나 과장없이 강렬하게 연기한 배우의 능력도 상당했다고 봅니다. [미스 플라워]에서는 젊고 예쁘기만 해서 헐렁한 느낌이었는데, 역시 나이가 들고 경력도 느니까 나아지나 봐요.

에단 호크도 괜찮습니다. 그의 역은 적절하고 정도에 맞습니다. 하지만 빈센트에겐 제롬이 가진 비극적인 강렬함이 없으니 그의 연기 범위도 제한되어 있죠.

우마 서먼은 여전히 예쁘지만, 이 영화에서 아이린은 주인공의 여자 친구 이상은 아닙니다.

언제나 훌륭한 조연인 알란 아킨은 이 영화에서도 완벽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어네스트 보그나인도 잠깐 나오는데 연기력보다 그의 친숙한 하층계급 이미지를 이용하기 위한 계략 같습니다. 요새 가끔 배우로 외도하는 고어 비달이 조역으로 나오니 참고해두실 일이고... 참 가브리엘 리스 팬들 계세요? 체육관 장면에서 코치로 아주 잠깐 나오니까 흥미있으신 분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세요.

7.

의도적으로 또는 실수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몇가지 SF적 트릭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이런 유전자 계급 사회의 상황은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미 언급하셨지만, 유전자 조작이 그 정도 수준으로 가능하다면 결함을 보완하는 치료의 수술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말이니까요.

그리고 유전자는 삶의 절반 정도밖에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후천적인 노력과 성장과정도 그만큼이나 중요하죠.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살인범은 유전자 조작으로 폭력성향이 제거된 인물이 아니었던가요? 빈센트가 안톤과의 경주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정신력의 승리라기보다는 지속적 트레이닝의 결과겠고요. 고로 이렇게 철저한 유전자 계급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가능성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뭐 SF가 미래 예언 도구인 건 아니니까요.

살인사건 수사도 실제로 그래야 하는 것보다 훨씬 방만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유전자 검색을 몇 초만에 끝내는 정보처리 능력이라면 숨어있는 부적격자를 찾아내는 건 식은죽 먹기가 아니겠어요? 게다가 빈센트는 이미 가타카에서 일한 적이 있었으니 그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면 범인찾는 건 시간 문제일텐데 말이에요. 그는 성형수술도 받지 않았으니 사진만으로도 분별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변장을 해도 변하지 않는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만 가려내도 일일이 유전자 검색 따위는 할 필요도 없지요.

이 문제점은 플롯과 상당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제가 생각해도 해결책이 단박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플롯을 건드리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98/05/04)

D&P

기타등등

[가타카]의 포스터는 괜찮지만, 왜 멀쩡한 에단 호크의 얼굴을 그렇게 망가뜨렸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그렇게 찍어놓으니까 꼭 패트릭 스웨이지의 배다른 동생 같아보여요, 툴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