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실방 쇼메 Sylvain Chomet

세 쌍둥이, 마담 수자, 브뤼노

많은 평론가들은 실방 쇼메의 [벨빌 랑데부]를 자크 타티의 작품들과 비교합니다.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어요. 타티의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벨빌 랑데부]도 느긋한 페이스로 진행되는 무성 영화 코미디이니까요. 쇼메 역시 타티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었는지 몇몇 공식적인 힌트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윌로씨의 휴가]의 포스터가 방에 걸려있고 텔레비전에서는 [Jour de Fête]가 나오는 식이죠.

하지만 [벨빌 랑데부]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내용은 타티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타티의 영화는 종종 현대 기계 문명의 무시무시함과 비인간성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밝고 낙천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처럼 무시무시하게 다루어지는 현대 기계 문명 역시 순진한 경외와 찬탄의 대상이기도 했지요. 타티의 영화에서는 부정적인 느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벨빌 랑데부]에는 타티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낙천성은 없습니다. 영화는 어둡고 불쾌하며 전체적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담 수자라는 작달막한 프랑스 할머니입니다. 마담 수자는 손자인 샹피옹과 그의 애견 브뤼노와 함께 기차길 옆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낡은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전거 경주에 참가한 샹피옹이 정체불명의 남자들에게 납치되고, 마담 수자는 브뤼노와 함께 손자를 구출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은 대양 저편에 서있는 거대한 메트로폴리스 벨빌입니다.

비교적 단순한 영화의 줄거리는 일종의 신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만큼 스토리가 원형적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나 설정이 서구 신화 특유의 독특한 느낌을 풍기고 있기도 하죠. 대표적인 예가 마담 수자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들로 등장하는 벨빌의 세 쌍둥이입니다. 30년대에 전성기를 거쳤던 이 늙은 퇴물 가수 자매들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들처럼 고전적인 세트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복고적입니다. 갈색조의 화면이나 20세기 중반의 대중 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오마주(벨빌의 세 쌍둥이들을 소개하는 도입부의 텔레비전 화면을 자세히 보면 장고 라인하르트, 프레드 아스테어, 조제핀 베이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도 그렇고 뉴욕, 몬트리올, 파리를 하나로 합쳐 30년대 SF식으로 믹스한 듯한 벨빌의 풍경도 그렇지요. 실방 쇼메는 이 시대의 문화적 산물들을 부수고 재조립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햄버거를 들고 서 있는 벨빌은 그런 문화적 혼합의 절정이지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타티의 작품에서 벗어납니다. 타티는 소박하고 구식인 남자였지만 이처럼 철저하게 과거지향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와 정면 대결을 했지요. 하지만 쇼메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영화나 음반, 책으로 존재하는 예술작품들입니다.

이 영화가 은근슬쩍 무서운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벨빌 랑데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조금씩 유령같습니다. 마담 수자와 벨빌의 세 쌍둥이들은 유효기간이 지난 낡은 습관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퇴물들입니다. 샹피옹은 할머니의 보호 밑에서 자전거 훈련을 받을 때도, 마피아에게 끌려가 중노동을 할 때도 페달을 밟는 것 이외에는 어떤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유의지보다는 장르 습관과 각본가가 지정해준 설정에 따라 그냥 움직입니다. 마치 좀비들처럼요. 영화의 느릿느릿한 페이스도 그런 섬뜩한 느낌을 과장합니다.

쇼메의 유머 감각도 그런 독특한 불쾌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프레드 아스테어를 잡아먹으려 덤벼드는 이빨달린 탭 댄스 구두도 그렇고, 아직도 살아있는 개구리들이 꿈틀거리는 세 쌍둥이들의 개구리 요리도 그렇지요. 영화 후반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카 체이스 장면은 굉장히 독특하기도 하지만 장르 규칙의 무관심한 변용과 냉정함 때문에 섬뜩한 느낌도 줍니다. 아무리 만화적 액션으로 포장되었다고 해도 상당한 수준의 학살이 벌어지는 것도 잊어선 안될 겁니다.

[벨빌 랑데부]는 분명 주목할만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어요. [벨빌 랑데부]의 개성은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와 상업용 장편 영화의 한계 속에 비교적 얌전하게 갇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쇼메는 이 한계 속에서도, 최근 할리우드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들에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냈습니다. (04/06/11)

DJUNA

기타등등

요새 실방 쇼메는 3D 컴퓨터 그래픽 영화를 준비 중이라더군요. 그의 개성이 이 새 매체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두고 봐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