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1981) * * *
감독
김수용
주연
김혜자....혜림
정동환....민기
여운계....교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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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의 [만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프락시텔레스의
걸작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본들은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고 남은 건 복사본들과 리메이크 영화들뿐이니까요.
프락시텔레스의 작품들이 로마의 조각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복제되었던 것처럼 이만희의 영화도 세 차례나 리메이크되었습니다.
72년에 사이토 코이치가 일본에서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75년에 김기영이 [육체의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81년에 김수용이 [만추]라는
원제로 한 번.
이들 중에서 원작을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가 되는 작품은 김수용의 [만추]입니다. 일본판 리메이크는 구하기 어렵고, 김기영의 영화는 워낙 감독의 개성이 강해서 리메이크라는 딱지를 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울 지경이잖아요. 김수용의 영화도 이만희가 만든 원작의 복사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작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엔 훨씬 도움이 됩니다. 결국 이 영화가 유명한 건 김지헌이 쓴 근사한 설정의 각본 때문이기도 하고 김수용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요.
영화의 내용은... 음, 또 이야기해야 하나요? 살인죄로 수감되었다가 하루 휴가를 얻은 여자 주인공이 기차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 물론 남자도 별로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어 체포되기 때문에 둘이 교도소 앞에서 나눈 재회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작에서는 위폐범 혐의로 쫓긴다던데, 여기서는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깡패 두목을 찔러죽이더군요.
영화는 김지헌이 원작에서 쌓아올린 설정의 진지함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두 외로운 사람들이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말이에요. 특별한 장식없이 묘사된 이들의 이야기는 쉽게 관객들에게 전이됩니다. 가끔 들리는 조연들의 '성우 연기'와 약간 오버하는 문어체 연기가 귀에 걸리지만, 연기 스타일 역시 현대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구식은 아니고요.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과는 달리 김수용의 [만추]는 조용한 영화입니다. 처음부터 입닥치기로 작정한 영화죠. 그 왜 있잖아요. 영화 감독들의 '모든 걸 영상으로 보려주련다'식의 오기말이에요. 주인공 혜림역의 김혜자는 영화 전체를 통해 원고지 한 장을 간신히 채울 정도밖에 대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사 대부분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혜림에게 수작을 거는 남자 주인공 민기역의 정동환 차지인데, 그 역시 비교적 절제된 편이고 일방적인 대사들은 같은 분량의 대화만큼 에너지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조용함을 크게 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용하다'는 표현은 대사의 양에 대한 기술일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만추]는 결코 조용하거나 담담한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지를 통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영화이죠. 정일성이 찍은 화면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만큼이나 요란하기도 합니다. 각본에서 지워낸 대사들이 배우들의 표정 연기와 제스처 그리고 온갖 직설적인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이죠.
전체적으로 [만추]는 그렇게까지 자유롭게 흐르는 영화는 아닙니다. 보다보면 연출부터 주연배우들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틀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건 '예술영화'의 자의식일 수도 있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일 수도 있으며 원작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건 두 주인공의 비극적 정서가 유려하게 흐를만큼 영화가 자유롭다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모든 것들이 지나칠 정도로 잘 조직된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지요. 결정적인 순간까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나서서 남자 주인공이 관련된 범죄 사건만 알리고 다시 사라지는 라디오 뉴스 방송처럼요.
김수용의 [만추]를 통해 우린 이만희의 원작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을까요? 모를 일이지요. 김수용의 영화를 꼭 이만희의 사라진 영화에 대한 대안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고요. 하지만 아무리 이 영화를 독립적인 작품으로 읽으려해도 지금은 사라진 원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이 영화를 바라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04/01/19)
DJUNA
기타등등
미래의 사학자들은 이 영화에서 섹스를 하자마자 여자에게
말을 놓는 한국 남자들의 습관을 발견하고 배꼽을 잡겠지요.
아니, 꼭 미래까지 갈 필요도 없으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