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P.J. 호건 P.J. Hogan

주연
제레미 섬터....피터 팬
Jeremy Sumpter....Peter Pan
레이첼 허드-우드....웬디 달링
Rachel Hurd-Wood....Wendy Darling
제이슨 아이작스....달링씨/후크 선장
Jason Isaacs....Mr. Darling/Captain Hook
린 레드그레이브....밀리센트 숙모
Lynn Redgrave....Aunt Millicent
리처드 브라이어스....스미
Richard Briers....Smee
올리비아 윌리엄스....달링 부인
Olivia Williams....Mrs. Darling
제프리 파머....에드워드 퀼러 카우치 경
Geoffrey Palmer....Sir Edward Quiller Couch
해리 뉴웰....존 달링
Harry Newell....John Darling
프레디 포플웰....마이클 달링
Freddie Popplewell....Michael Darling
뤼디빈느 사니에....팅크
Ludivine Sagnier....Tink
시어도어 체스터....슬라이틀리
Theodore Chester....Slightly
루퍼트 시모니언....투틀스
Rupert Simonian....Tootles
조지 맥케이....컬리
George MacKay....Curly
헤리 에덴....닙스
Harry Eden....Nibs
카슨 그레이....타이거 릴리
Carsen Gray....Tiger Lily

피터 팬과 웬디

듀나 [피터 팬] 영화를 만들면서 웬디를 원작 속의 웬디처럼 그리는 건 이제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파프리카 그렇지요? [피터 팬]의 웬디는 현대 관객들에게 어필하기엔 지나치게 '기집애'같아요. 요새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얌전하게 굴면서 내숭만 떨면 안됩니다. 당연히 뜯어고쳐야지요. P.J. 호건이 [피터 팬]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해적들과 한판 붙을 정도로 말괄량이기도 해야하고 맘에 드는 상대에겐 먼저 접근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해야하겠고요. 이런 개작은 모험적이지도 않고 도전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하지요. 요새는 거의 클리셰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듀나 이런 식의 기계적인 캐릭터 개조가 모든 영화에 먹힌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어요. 그런 개조가 맞는 영화도 있고 안 맞는 영화도 있지요. 정치적으로 공정한 개조라고 해서 그게 곧장 가치있는 해석이 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먹힙니다. 활달한 웬디는 영화 [피터 팬]의 스토리 논리와 완벽하게 맞거든요. 원작에서와는 달리 호건의 [피터 팬]의 진짜 주인공은 웬디잖아요. 원작에서야 피터 팬과 길잃은 소년들에 대응하는 막연한 여성적 이미지로 밀어붙여도 문제가 없지만, 관객들로부터 보다 적극적인 공감을 끌어내야 하는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자격을 주기 위해 뭔가를 더 붙여야합니다.

파프리카 전 이 영화의 웬디를 보면서 계속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지요.

듀나 누구요?

파프리카 [천상의 피조물들]의 줄리엣 흄요! 이 영화의 웬디는 줄리엣처럼 상상력 풍부한 이야기꾼이잖아요. 줄리엣처럼 웬디 역시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요. 이 영화의 네버랜드는 [천상의 피조물들]에 나오는 제4세계와 특별히 다를 것도 없어요. 피터 팬은 보다 순화된 버전의 디엘로고요.

듀나 그렇기도 하겠군요. 하여간 이 영화에서 '페미니스트 터치'는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자, 이 영화에서 웬디는 어떤 존재인가요? 어른이 되는 게 두려운 12살짜리 소녀입니다. 도대체 왜 그게 두려운데요? 육체와 정신이 변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어른이 되면 당연히 져야 할 책임감과 같은 것들 때문이죠. 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꾼인 한 소녀가 엄격한 빅토리아 시대의 시스템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그보다 더 암담합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들 때는 잠시 용납되었던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웬디에게 피터 팬은 도피처를 마련해줍니다. 네버랜드에서 웬디는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멋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영원히요. 멋지죠?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웬디는 그 자리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사회의 규율에서 탈출한 건 좋았습니다. 하지만 네버랜드는 또 하나의 굴레이며 덫입니다. 웬디는 결코 그 아이들만의 세계에서 살 수 없어요. 그 아이의 정신과 육체는 변화와 발전을 원합니다. 어린아이로서 영원히 남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한 여성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지요.

웬디

영화는 웬디를 이 딜레마 속에 던져놓고 정신없이 휘저어댑니다. 웬디에게 영원한 젊음과 어린아이다운 아름다움으로 무장한 피터 팬이나 구세대의 노련함과 예스러운 교양으로 웬디를 유혹하는 후크 선장은 모두 매력적인 존재들이죠. 웬디가 네버랜드를 대표하는 이 두 캐릭터에게 번갈아 말려들어가는 과정은 모두 축축한 성적 유혹을 통해 전개됩니다. 심지어 설정상 결백한 무성의 존재여야 할 것 같은 피터 팬 역시 그 위태로운 선 위에서 망설이고 있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곧 힘을 잃습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피터 팬은 결국 어른이 되는 게 두려운 겁쟁이 도망자일 뿐이고 후크는 실망과 좌절 속에 늙어버린 초라한 남자일 뿐입니다. 웬디에게 유일한 해피 엔딩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현실이 자신을 억누르려 한다면 싸우고 원하는 걸 쟁취하면 되지요. 적어도 그 싸움은 자기의 꿈 속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가치있는 일일 거예요.

파프리카 그러나 이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배열되어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예를 들어 웬디와 피터 팬의 러브 스토리는 도망자의 이야기치고는 상당히 깊이 들어갑니다. 그 절정은 웬디와 피터 팬의 키스 신입니다. 웬디의 키스가 없었다면 피터 팬은 후크에게 졌겠지요. 그 키스신은 이 영화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처럼 보입니다.

후크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봤으면 해요. 후크는 분명 어른처럼 굴고 어른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제이슨 아이작스가 일인이역을 연기하고 있는 웬디의 아버지 달링씨처럼 지루한 회색 현실 속에 갇혀있는 남자도 아니지요. 그럼 도대체 후크는 뭔가요? 피터의 시점에서 본 '어른'의 캐리커처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후크는 피터가 필요로 해서 만들어낸 '어른의 탈을 쓴' 적수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웬디의 이야기에서 후크는...

듀나 너무 엄밀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요.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면 재미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웬디의 시점에 맞추어야 해요. 그렇게 하면 후크의 존재는 쉽게 이해됩니다. 피터 팬이 어떻게 생각하건 웬디에게 후크는 성인 남성의 캐리커처 또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존재합니다. 후크는 사춘기 아이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허울뿐인 존재입니다. 유혹적이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었지요. 그가 "늙고 못생겼어"라는 아이들의 외침 속에 그렇게 쉽게 주저앉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해적 선장이라는 허울 이외엔 가진 게 없으니까 말이에요. 그는 12살 소년의 상상 속에 갇혀 평생을 허수아비처럼 살아온 딱한 인간입니다.

파프리카 결국 이야기는 "꿈은 마음 속에 품고 현실을 보자"로 돌아가는 건가요?

듀나 그렇겠죠. 뻔한 교훈이긴 하지만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유익한 교훈이기도 하죠.

그러나 이 영화가 주는 정서적 힘은 교훈에서 오는 게 아니에요. 그 당연한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오지요. 호건의 [피터 팬]은 자라고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잠시 동안이나마 가지고 있던 그 모든 자유, 아름다움, 무구함은 얼마나 쉽게 사라지나요. 그리고 그들의 영원함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요. 창 밖에서 달링 가족들을 바라보는 피터 팬은 그래서 무척 쓸쓸해보입니다. 그는 불멸과 불변을 택했지만 그건 곧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변화와 죽음은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중요한 일부이니 말이에요.

파프리카 그러고보면 피터 팬은 어린 시절이 육화된 유령인지도 모르겠군요.

피터 팬

듀나 이 점에선 원작도 특별히 다를 게 없었죠. 호건의 영화에서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지. 따지고 보면 배리의 원작은 원래부터 그렇게까지 행복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원작을 꺼내 어른이 된 웬디가 피터 팬과 재회하는 장면을 다시 읽어보세요.

파프리카 호건의 [피터 팬] 영화에서 재미있는 건 성숙한 드라마의 느낌과 거의 캠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흥겨운 동화적 느낌의 결합이지요. 하긴 이 분위기는 그의 이전 작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요. [뮤리엘의 웨딩]이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도 모두 [피터 팬]과 비슷한 잡탕의 냄새가 나는 영화들이었잖아요.

듀나 네, 이 영화에서도 호건은 그렇게까지 내숭을 떤 편은 아니었습니다. 볼링공처럼 우주를 굴러다니는 행성들이나 맥스필드 패리쉬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하얀 구름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분명 체면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순수한 쾌락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가끔 컴퓨터 그래픽이 과하게 쓰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요.

그러나 호건은 결코 네버랜드의 어두운 면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채도를 잔뜩 높인 네버랜드의 밝은 모습 뒤에는 물갈퀴가 달린 끈적거리는 손을 내미는 인어들과 살이 뜯겨져 나간 해골들이 사슬에 묶여있는 블랙 캐슬의 차가운 어두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상당히 유기적으로 얽혀있습니다. 12살 아이의 순진무구한 상상처럼 보이는 모험담 속에 섹스와 죽음의 그림자가 숨어있는 것처럼요. 놀이동산의 인공적인 느낌으로 가득 차 있던 [후크]의 네버랜드와 비교해보면 호건의 비전은 더욱 믿음직해보입니다.

파프리카 제레미 섬터는 어느 새 그렇게 갑자기 컸대요? [프레일티] 때는 정말 꼬맹이었는데... 정말 얼굴도 구별 못하겠더라고요.

듀나 영화 촬영하는 동안에도 키가 쑥쑥 자라서 웬디의 창을 몇 번이나 다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파프리카 그런데 왜 피터 팬만 미국인인 거죠? 특별히 피터 팬만 미국 악센트를 써야 할 필요가 있나요?

듀나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달링 집안 사람들을 성조기를 휘두르는 미국인 애국자로 만든 허버트 브레넌 버전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문명화되고 꽉 짜여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야만적이고 자유로운 네버랜드의 대조도 분명해질 수 있을 거고요. 전 레이첼 허드-우드의 절도있는 영국식 영어와 섬터의 보다 풀어진 어투가 충돌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었어요.

파프리카 아, 저도 허드-우드가 좋았어요. 어린아이와 성인여성 사이에 놓인 그 가느다란 선 위를 위태롭게 오가는 이 친구의 섬세한 연기는 무척 설득력있었어요. 아직 풋내기인 걸 생각해보면 쓸만한 영화를 몇 편 더 기대해볼만하군요.

듀나 제이슨 아이작스의 일인이역 연기는 모두 좋았지만 후크 역엔 조금 더 과장된 카리스마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군요.

후크

파프리카 너무 그럴싸했다면 오히려 영화가 지나치게 유려하게 흘러가지 않았을까요? 그런 빈틈이 오히려 이 영화의 후크에 어울리지 않았어요?

듀나 흠... 글쎄요. 거기서부터는 정말 취향 문제인지도 모르죠.

뤼디빈느 사니에의 팅커 벨에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기대했던 섹시한 이미지하고는 전혀 상관 없었으니까요. 이 영화의 팅커 벨은 원작처럼 짜증나고 조금은 매정한 요정이었죠.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요? 이 친구가 갑자기 섹시 스타처럼 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잖아요. 그렇다고 [피터 팬] 영화에서 팅커 벨이 오종 영화에서처럼 마구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적어도 사니에는 줄리아 로버츠보다 훨씬 팅커 벨다웠어요.

파프리카 사람들은 "또 [피터 팬]이야?"라고들 하지만 사실 [피터 팬] 영화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적은 거의 없었잖아요. 브레넌 버전은 무성 영화였고 디즈니 것은 애니메이션이었고 나머지는 브로드웨이 버전을 텔레비전용으로 녹화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이 영화는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최초의 [피터 팬] 영화일 수도 있어요.

듀나 그렇긴 해요. 스토리는 바뀌고 캐릭터는 업그레이드되었지만 호건의 영화만큼 배리의 원작이 품고 있는 정서를 꿰뚫은 작품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물론 호건의 영화도 구멍이 많긴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워요. 적어도 전 지금 이 영화에 대해 충분히 관대해지고 싶은 기분이랍니다. (04/01/22)

D&P

기타등등

끝까지 보시면 팅커 벨의 작별 인사를 들으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