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 (1994) * * * *

감독
피터 잭슨 Peter Jackson

주연
멜라니 린스키....폴린 파커
Melanie Lynskey....Pauline Parker
케이트 윈슬렛....줄리엣 흄
Kate Winslet....Juliet Hulme
사라 페어스....오노라 파커
Sarah Peirse....Honora Parker
다이아나 켄트....힐다 흄
Diana Kent....Hilda Hulme
클라이브 메리슨....헨리 흄
Clive Merrison....Henry Hulme
사이몬 오코너....허버트 리퍼
Simon O'Connor....Herbert Rieper
제드 브로피....존/니콜라스
Jed Brophy....John/Nicholas
피터 엘리엇....빌 페리
Peter Elliott....Bill Perry
길버트 골디....베네트 박사
Gilbert Goldie....Doctor Bennett
제프리 히스....노리스 목사
Geoffrey Heath.... Reverend Norris
커스티 페리....웬디 리퍼
Kirsti Ferry....Wendy Rieper
벤 스켈럽....조너슨 흄
Ben Skjellerup....Jonathon Hulme
다리엔 태클....스튜어트 선생
Darien Takle....Miss Stewart
엘리자베스 무디....월러 선생
Elizabeth Moody....Miss Waller
리즈 뮬랜....콜린즈 선생
Liz Mullane....Mrs. Collins

1. Heavenly Creatures

일단 이 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귀찮아서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게 어렵지는 않으니까 상관없을 겁니다. 이 시는 [헤븐리 크리쳐즈(이하 HC라고 칭합니다. [천상의 피조물]은 관용적인 표현을 직역한 것이라 영 어색하고, 복수를 단수로 잘라버린 [헤븐리 크리쳐]는 의미 자체를 왜곡하는 것 같으며, [헤븐리 크리쳐즈]라고 쓰자니 일단 긴 데다가 '즈'가 영 거슬리는군요)]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폴린 이본 파커가 1953년도 일기장의 뒷 장에 쓴 것입니다. 이 일기장은 파커-흄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한시간 뒤에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줄리엣이 요양원에서 나오는 장면부터 폴린의 보이스 오버로 들려집니다. 자, 이제 이 영화 제목의 출처를 아시겠죠?

THE ONES THAT I WORSHIP

There are living among(st) two dutiful daughters
Of a man who possesses two beautiful daughters
The most glorious beings in creation;
They'd be the pride and joy of any nation.

You cannot know, nor (yet) try to guess,
The sweet soothingness of their caress.
The outstanding genius of this pair
Is understood by few, they are so rare.

Compared with these two, every man is a fool.
The world is most honoured that they should deign to rule,
And above us these Goddesses reign on high.

I worship the power of these lovely two
With that adoring love known to so few.
'Tis indeed a miracle, one must feel,
That two such heavenly creatures are real.

Both sets of eyes, though different far, hold many mysteries
     strange.
Impassively they watch the race of man decay and change.
Hatred burning bright in the brown eyes, with enemies for fuel,
Icy scorn glitters in the grey eyes, contemptuous and cruel.

Why are men such fools they will not realize
The wisdom that is hidden behind those strange eyes?
And these wonderful people are you and I.

2. 피터 잭슨

최근들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는 일련의 뉴질랜드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나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뉴질랜드를 다소 졸립고 평온한 곳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캠피온이나 잭슨, 맥클린 같은 사람들을 극한으로 몰고가는지도 모릅니다.

피터 잭슨은 그 악명 높은 [배드 테이스트]를 찍은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성품 컬트 영화를 찍는 괴짜 감독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배드 테이스트], [미트 더 피블즈], [데드 얼라이브]... 모두 살육과 거친 유머, 망칙한 영상으로 가득찬 괴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독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기성품 컬트 정도는 누구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배드 테이스트]는 어떻게 하면 컬트광이라는 애들에게 머리를 안 쓰고 영화를 팔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일부러 엉망으로 연기하고 스토리는 될 수 있는 한 무성의하게 만들고 가끔 구역질나는 장면 몇 개 보여주고... 땡! 그러면 컬트광들은 열광하고 비평가들은 공들여서 그 영화를 변호해주고 새로운 명칭을 붙여줄 것입니다.

[배드 테이스트]는 아직도 흥미진진한 작품이지만 저에겐 그 엉망인 부분보다는 잭슨이 무의식적으로 노출시키는 능숙한 면이 더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가 화려하고 거창한 [데드 얼라이브]로 돌아왔을 때, 잭슨은 확실히 자신의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데드 얼라이브]는 사실 [배드 테이스트]같이 엉터리 영화가 아닙니다. 스토리는 잡다한 온갖 장르에서 끄집어낸 것 같지만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특수효과는 잘 된 편이며 스태디캠을 능숙하게 휘둘러대며 찍어댄 정신없는 화면은, 나중에 차분하게 다시 생각해보면, 어느 차원으로건 아주 영리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유머는 무척이나 세련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분명히 자기가 영화를 '잘'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HC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진지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놀란 모양이지만, 생각해보면 놀랄 일은 아니었죠. 잭슨에게 제가 기대를 거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재방송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거든요. 잭슨이 스플래터 무비의 거장이라고요? 그가 만든 순수한 스플래터 무비는 [데드 얼라이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네 편의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번 주에 개봉될 [프라이트너]는 빼고) 네 영화는 모두 장르가 달랐습니다. [배드 테이스트]는 싸구려 SF이고, [미트 더 피블즈]는 성인용 인형극, [데드 얼라이브]는 좀비 영화, HC는 사이코 드릴러입니다. [이블 데드]를 커리어 전체를 통해 울궈먹는 샘 레이미보다 잭슨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에요. 그는 늘 새로운 걸 찾아 헤매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의문이 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들을 찾는 건 좋습니다. 그러나 HC도 잭슨 영화일까요? 잭슨이 갑자기 고상해져서 과거의 자신을 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요? 혹시 자기도 고상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헐리웃에 안기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답변을 대신해야 한다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여전히 너무나 잭슨답습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잭슨 특유의 지나침이 철철 넘쳐 흐릅니다. 영화는 [데드 얼라이브]보다 훨씬 빨라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고 잭슨이 늘 끼워넣는 사람 재미있게 죽이기 놀이도 자비로운 디엘로 덕분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네가 남자애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낸다면..."따위의 바보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베네트 박사의 배에서 디엘로의 칼이 마치 발기한 페니스처럼 쑥 삐져 나오는 장면은 정말 배꼽잡을 만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 뒤도 황당했겠군요. 디엘로가 "멍청한 바보!"하고 외치며 칼을 쑥 올렸을테니 배꼽부터 머리까지가 둘로 딱 갈라졌겠네요. 깔깔깔...)

그러나. HC는 충분히 잭슨다우면서도 이전 잭슨 영화들로부터 확실한 차별성을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3. 파커-흄 사건

1954년 6월 22일 화요일 오후 3시 30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빅토리아 파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두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근처 찻집에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바로 몇 분 전에 어떤 여자와 함께 그 찻집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두 소녀는 울부짖으면서 엄마가 심하게 다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쳐댔습니다. 찻집 주인인 아그네스 리치의 신고로 경찰이 공원에 도착했고 그들은 둔기로 처참하게 살해당한 중년 여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흉기로 쓰인 듯한 벽돌 반쪽과 그것을 싼 것으로 추정된 스타 킹 한 짝도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이름은 오노라 리퍼(45)였고 사건을 신고한 두 소녀는 피해자의 딸 폴린 이본 리퍼(16)와 그녀의 친구인 줄리엣 마리온 흄(15)이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놀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밤에 사람들이 문도 안 잠그고 자는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경찰은 폴린 이본 파커(살인 이후 오노라 리퍼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폴린은 자동적으로 어머니 성을 따르게 되었습니다)를 어머니 살해 혐의로 체포했던 것입니다. 줄리엣 마리온 흄도 그 다음날 살인 공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폴린 파커가 쓴 두 권의 일기였습니다. 일기를 통해 경찰은 폴린이 어머니를 두 소녀의 우정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몇 달 동안이나 살의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폴린은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지만 줄리엣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둘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정신병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두 소녀(특히 줄리엣)의 명민하고 또릿또릿한 태도에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은 각자 다른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몇 년 뒤 다시 만나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붙은 채로 석방되었습니다. 줄리엣은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갔고 폴린은 뉴질랜드에 남았습니다. 그녀는 1965년까지 가석방 상태로 남아있었습니다.

HC가 개봉된 지 얼마되지 않아, 뉴질랜드의 일간지 선데이 타임즈의 영리한 기자인 린 퍼거슨이 줄리엣 흄의 현재 이름을 밝혀냈습니다. 그녀는 70년대부터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일련의 추리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영국 작가 앤 페리였습니다. 그러나 폴린 파커의 현재 상황이나 이름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오클랜드의 어느 기독교 서점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폴린 정보의 업데이트는 아래 '기타 등등'에서 찾아보시길.)

4. HC다움과 잭슨다움

파커-흄 살인사건에 매료되어 언젠가 영화화하고 말겠다는 계획을 어릴 때부터 품고 있었던 사람은 피터 잭슨이 아니라 프랜시스 월시였습니다. 월시는 이미 [미트 더 피블즈]와 [데드 얼라이브]에서 잭슨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각본가이며 그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데드 얼라이브]의 성공으로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잭슨에게 월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여주었고, [데드 얼라이브] 류의 영화를 또 찍을 생각이 없었던 잭슨은 곧 그 아이디어에 빠져버렸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는 월시가 고마워죽겠지만, 칭찬을 이것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월시와 잭슨이 쓴 HC의 각본이 정말 좋기 때문입니다.

잭슨 영화에서 각본을 칭찬해야 하다니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시체가 동강나는 장면들에 기겁하지 않고 자세히 보면 그의 [데드 얼라이브]도 각본은 상당히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공의 일부분을 월시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월시와 잭슨의 각본은 사실에 아주 충실합니다! 날짜들은 대체로 정확하며 학교 선생들과 베네트 박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존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성격과 말버릇도 정확하게 재현되었지요. 보로브니아의 찰스, 드보라, 디엘로, 니콜라스 역시 진짜 줄리엣과 폴린이 만들어낸 실제 창조물들입니다. 심지어 범행 직전에 언급되는 '비극적으로 끝나는 3막 오페라'도 사실에 근거한 것이며 보석을 떨어뜨려 어머니의 주의를 돌린 뒤 벽돌로 머리를 내리치는 살인의 안무까지 사실 그대로입니다. 나중에 앤 페리 자신이 몇몇 잘못된 상황을 지적하기도 했고(예를 들어 실제 줄리엣과 폴린은 찰흙인형으로 롤 플레잉 게임을 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열광적인 HC 광들에 의해 약간의 실수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정확성에 대한 노력만은 알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 어느 누구도 이 영화를 세미 다큐멘터리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사실을 아주 자유롭게 각색했다고 보았습니다. 하긴 찰흙 인형이 살아서 돌아다니고 유니콘이 정원에서 뛰어노는 영화를 사실 그대로라고 여기는 건 힘들겠지요! 잭슨과 월시는 사실을 고수하기로 결심했지만 폴린의 일기가 원래부터 신비주의와 로맨스로 가득차 있었고 모호한 구석도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자기들의 상상력을 뿌리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잭슨다움'이 가장 잘 발휘되는 부분은 이런 환상적인 장면들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HC에는 예전 잭슨 영화들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HC는 '진지한 영화'입니다.

몇몇 골수팬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잭슨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흔해빠진 진지함이 아니라고. 그런 것 따위는 헐리웃의 흔한 감독들에게서나 찾으라고. 그러나 아무리 잭슨이래도 언제나 놀고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도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HC도 그렇게 나이 많은 영화는 아닙니다. 결국 영화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주인공들인 두 틴에이저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잭슨은 분명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철저한 감정이입을 시도했습니다. HC는 예전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의 소용돌이로 끓어넘칩니다. 틴에이저들의 호르몬 과잉 판타지를 이렇게 요란하게 그려내면서도 영화가 결코 웃음거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잭슨과 월시는 늘 도취되어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은 줄리엣과 폴린의 환상에 매료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것을 볼 줄도 압니다. 예를 들어 사라 피어스가 훌륭하게 연기해낸 오노라 파커를 보세요. 잭슨은 그녀를 답답한 바보로 캐리커쳐화 시키지 않습니다. 오노라는 생각의 폭은 좁지만 딸의 장래를 걱정하고 일에 충실한,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여성입니다. 그녀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잭슨이 그려낸 살인 장면들 중 가장 쇼킹합니다. 잭슨이 살인을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으며 살인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도 않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우리는 오노라 파커의 죽음에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정심이라니, 피도 눈물도 없는 전기톱 살인마인 줄 알았던 잭슨에게 이런 면도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죠? HC는 인간적인 깊이를 무시하지 않는 영화이며 바로 그 때문에 어느 정도 어른스럽게 보입니다.

5. "나는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아..."

가끔다가 인상적인 경구를 내뱉는 버릇이 있는 줄리엣은 폴린의 커다란 다리 상처를 발견한 뒤 그녀 특유의(사실은 윈슬렛 특유의) 어마어마한 영국식 억양으로 다음과 같이 내뱉습니다. "모든 훌륭한 사람들은 뼈나 폐에 병이 있어. 정말 끔찍하게 로맨틱해." 줄리엣의 이 대사는 HC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솔직하게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사실 HC는 최근 몇 년 동안 만들어진 영화들 중 광기와 질병에 대한 가장 로맨틱한 비전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HC만큼 '건강'이라는 단어가 혐오스럽게 사용된 영화가 얼마나 될까요? 줄리엣의 주위를 끊임없이 감싸는 '네 건강에 좋으니까'란 말은 저주처럼 들리고 베네트 박사나 흄 교수가 언급하는 '건강한 우정'은 한마디로 멍청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줄리엣의 폐병은 극도로 미화되고 광기는 그들을 진부한 세계에서 구해주는 귀족적인 탈출수단이 됩니다.

결코 독창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세기 로맨티시즘 소설들이나 희곡들을 대충 훑어보세요. 폐병 걸리고 미친 여주인공으로 가득하지요. 당시 사람들은 폴린과 줄리엣이 쓴 것 같은 광기와 살육으로 가득찬 요란한 작품들을 읽으며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알아요. 미숙하지요. 원래 대중적인 로맨티시즘은 미숙한 정신의 소산이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틴에이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아이큐 170의 머리를 핑핑 돌리는 영리한 애들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충분히 정당성을 인정받을 만하지요.

질병과 광기에 대한 예찬만이 HC의 로맨티시즘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HC는 원래부터 기질적으로 엄청나게 로맨틱한 영화니까요. 잭슨은 이 로맨티시즘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일럼의 공주 줄리엣을 바라보는 폴린의 시선을 보세요. 영화 전체에 깔리는 마리오 란자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피터 다센트의 예스럽고 풍요로운 음악은 어떤가요? 아일럼에서 보로브니아로 이어지는 왈츠 신은 어떻고요?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폴린의 시도 빼먹을 수도 없죠. 사실 HC는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본 영화들 중 가장 로맨틱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점이 HC의 입체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HC는 로맨틱한 영화이면서 로맨티시즘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HC는 결국 [보봐리 부인] 스토리죠. 눈치채셨어요? 폴린이 왜 줄리엣에게 그렇게 집착했다고 생각하세요? 단지 마음이 잘 맞아서? 둘 다 체육시간 땡땡이 클럽 회원이라서?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잭슨다움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미트 더 피블즈]를 뺀 잭슨의 두 영화는 모두 동일한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뉴질랜드의 작은 마을 또는 작은 도시에 위협적인 이방인이 날아와 그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거죠. HC도 같은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이방인이 외계인이나 좀비, 랫몽키가 아니라 건방진 영국인 틴에이저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좀비로 만드는 대신 생선가게집 둘째딸을 유혹하고 그 엄마를 벽돌로 때려죽이지요.

6. 피터 다센트, 마리오 란자, 지아코모 푸치니

이 영화에서 음악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 사용 방법을 미묘하다고 칭찬까지 할 수는 없지만, 효과와 의미는 강렬합니다.

피터 다센트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현을 잔뜩 쓴 로맨틱하고 옛스러운 무드의 음악으로 영화를 장식합니다. 사실 그의 음악 중 가장 좋은 부분은 로맨틱한 요소입니다. 그가 드릴러 분위기를 낼 때는 다소 평범하고 뻔하거든요.

위에 언급한 세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마리오 란자입니다. 마리오 란자는 네 번째 세계의 가장 중요한 성자이기도 합니다. 현실 세계의 줄리엣과 폴린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자는 제임스 메이슨이었던 모양이지만 사실 메이슨이 영화에 나와서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찰스 2세의 얼굴이 메이슨을 닮아있긴 합니다만.

란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 영화를 로맨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끔가다 피터 다센트에 의해 증폭되는 그의 노래들은 모두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가사를 달고 있지요. 잭슨은 이런 가사들을 종종 폴린과 줄리엣의 동성애적인 감정에 대한 노골적인 힌트 (그는 이런 것들을 '구운 청어'라고 불렀습니다)로 제공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엔 잔인한 주석으로 삼기도 합니다. 폴린의 절망적인 비명과 함께 시작되는 엔드 크레딧에 깔리는 란자의 노래는 로저스-해머스타인의 뮤지컬 [회전 목마]에 나오는 노래 "You'll Never Walk Alone"인데 이 노래는 영화 첫부분에 나오는 성가 "Just A closer Walk With Thee"와 대위법적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폴린과 줄리엣이 '결코 다시 함께 걸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인물은 지아코모 푸치니입니다. 푸치니는 원래부터 오페라적인 화려함으로 가득찬 이 영화에 썩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란자의 다른 노래와 함께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오노라가 폴린을 줄리엣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할 때 들리는 [별은 빛나건만]은 옥중의 카바라도시가 토스카를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죠.

그러나 HC 팬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노래는 케이트 윈슬렛이 아일럼의 발코니에서 직접 부르는 [라 보엠]의 아리아 "Sono Andati" 겠지요. 이 노래에도 노골적인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이건 미미의 노래거든요. 줄리엣이 미미처럼 폐병을 앓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살인 장면 직전까지 나오는 [나비 부인]의 [허밍 코러스]는 '구운 청어'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기술적으로 따진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음악입니다. 살인 0시를 향해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와 함께 이 조용한 음악이 어떻게 극단적인 서스펜스를 조장하는 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요.

7. 배우

HC는 영화 자체의 질만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케이트 윈슬렛과 멜라니 린스키라는 재능있는 두 젊은 배우들을 발굴해낸 공로도 인정받아야 할 겁니다. 특히 윈슬렛은 HC 이후 영어권에서 가장 기대되는 젊은 배우로 떠올랐죠.

그러나 어디까지가 계산된 연기일까 의심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윈슬렛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HC를 찍으면서 결코 편한 마음으로 연기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화 속의 내용에 완전히 몰입되어 촬영이 끝난 뒤에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들 하거든요. 실제로 린스키와 윈슬렛은 영화 촬영 도중 급작스럽게 친구 사이가 되었고 그들의 실제 생활은 영화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 배우들의 실제 성격도 고려해 보아야 하겠지요. 린스키의 경우는 HC 이후 잽싸게 매스컴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알 수가 없지만 윈슬렛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배우가 원래 지닌 열광적이고 거친 성격과 강한 영국식 악센트는 줄리엣 흄과 우연히도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거든요.

이에 비하면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 보여준 윈슬렛의 연기는 차분하고 의식적으로 잘 조절된 것이었지요. 한마디로 발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는 HC의 정신없는 줄리엣을 더 좋아하지만요.

두 배우를 제외하더라도 우리는 오노라 파커를 연기한 사라 페어스의 신중하게 잘 조절된 연기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경력을 보면 페어스는 뉴질랜드의 김혜자 아줌마인 모양이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죠. 하지만 이 배우가 오노라 파커를 인간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해냈기 때문에 이 영화가 지상에서 아주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8. 그리고...

이 영화와 파커-흄 사건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얻으시려면 Fourth World로 가보세요. 존 D. 포터라는 열광적인 HC팬이 작성한 책 1권 분량의 엄청난 FAQ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이곳엔 실제 살인 당시 줄리엣과 폴린이 마셨던 음료수 종류까지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발견한 영화 관련 FAQ 중에서 가장 공들인 것이에요.

앤 페리는 여전히 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명성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영화의 덕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누가 HC를 보고 "아, 저 앤 페리라는 여자? 어렸을 때 아무 죄도 없는 불쌍한 중년 여자를 벽돌로 때려 죽였대..." 따위로 말하겠어요? 살인 자체는 끔찍하지만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로맨틱한 사건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이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좀 재미가 없기까지 해요. 지금의 앤 페리는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에다가 앰뷸런스 운전 자원 봉사자고 강한 윤리의식과 의무감으로 가득찬 고상한 추리 소설을 쓰고 있답니다. 네번째 세계로 그렇게 날아가고 싶어했던 줄리엣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죽었겠지요.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교살하기 마련이니까요. 솔직히 말해 앤 페리의 최근 증언도 100% 믿을 수가 없답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에요. 단지 어른 앤 페리가 무의식적으로 어린 줄리엣의 경험을 검열하고 있다는 것이죠. 편리하게도 그 사람은 선택성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앞뒤가 맞는 것 같아요. 페리의 증언은 가끔가다 당시 상황과 어긋나거든요.

폴린은 어떨까요? 폴린이야말로 이 사건의 진짜 주인공이었잖아요. 혹시 오클랜드에 가시면 아무 기독교 서점에 들러서 작은 키에 두꺼운 스타킹으로 다리의 상처를 감추고 있는 아줌마가 있나 찾아보세요. HC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96/07/17)

DJUNA


기타등등

1. 막 오즈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오는 길입니다. 역시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걸 다시 느꼈습니다. 전혀 딴 영화같더군요. 화면을 딱 따와 집에 보관해두었으면 좋겠어요. :-)

단지 번역은 좀 불만이더군요. The Fourth World를 사차원의 세계로 번역한 것이나 Deborah를 '데보라'로 표기하는 것 따위는 저같은 순수주의자의 신경을 꽤 긁습니다. :-)

2. 위에 올린 글은, 중간중간에 조금씩 수정하고 삭제하긴 했지만, 3년 전에 쓴 글이라서 조금 낡았지요.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우선 97년에 폴린 파커의 현재 이름과 삶이 밝혀졌습니다. 힐러리 네이던이라는 이름으로 랭커스터 근처의 후라는 동네에서 승마 학교를 열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루도 미사를 빼먹지 않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래요. 그러니 오클랜드의 기독교 서점은 뒤지지 마시길.

뉴질랜드 버전보다 9분 정도 짧은 미라맥스 버전에 열불터진 인터넷의 막강한 HC 컬트 팬들이 시작한 HC 십자군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미라맥스는 여전히 감감하고, 당사자인 피터 잭슨 역시 신경쓰지 않는 모양입니다. 오히려 와인스타인 형제의 편집이 영화를 더 날씬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나봐요.

[프라이트너]는 미국에서 흥행실패를 했지만 전 상당히 재미있게 봤습니다. 불평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요새 잭슨과 월시 콤비는 대작인 [반지의 제왕]을 준비 중입니다. [고질라]의 요란한 마케팅과 졸렬한 흥행의 여파로 [킹콩]리메이크는 포기했고요.

케이트 윈슬렛은 [타이타닉]으로 빅 스타가 되어 버렸습니다. 최근에는 제인 캠피언의 [홀리 스모크]에 출연했지요. 멜라니 린스키는 윈슬렛만큼 커리어를 높이 쌓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활동을 넓혀가는 중입니다. [에버 애프터]에서 그 사람의 최근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3. 도대체 왜 제가 이 영화에 매료되는 걸까요?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일종의 보상심리가 아닌가 싶어요. 전 이런 질풍노도의 틴에이저 시절을 겪은 적이 없거든요. 왠지 모르게 그 시절을 낭비한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