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지 발란쉰의 [세레나데]는 '순수 발레'의 대표작입니다. [세레나데]는 차이코프스키의 배경 음악이 그런 것처럼, 순전히 신체 동작의 아름다움만으로 구성된 작품이며 어떤 줄거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들 합니다. 하긴 앞부분은 그래요.

그러나 후반으로 접어들면 조금 이상합니다. 거의 수학적으로까지 보이던 발레는 갑자기 어떤 극적인 상황 속으로 빠져듭니다. 아무래도 두 여성 무용수와 남성 무용수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무용수들이 그렇게 절망적으로 바닥에 쓰러지고, 왜 허물어지는 것처럼 서로의 품에 몸을 묻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여기엔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요? 상상력을 조금만 동원한다면 우리는 [세레나데]에서 수십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세레나데]가 스토리를 가진 발레인가요? 아닙니다. [세레나데]에는 문학적인 스토리가 없습니다. 단지 '감정의 흐름'만이 있을뿐입니다.

2.

무용에서 이런 경우는 흔하디 흔합니다. 무용수들이 꼭 어떤 극적 상황 속에서 갈등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없죠. 그렇다고 안무가들이 관객들을 기만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공연이라면 관객들은 이런 알쏭달쏭한 상황 속에서도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불평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여기서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해낼 수 있습니다. 관객들을 '감동(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쓰기를 무척 싫어하는데,오늘은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것 같군요)'하게 하는 것은 꼭 구체적인 스토리나 주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무용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연극, 심지어 전도사의 집회나 전당대회에도 해당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언제나 [페르소나]의 예를 듭니다. [페르소나]는 줄거리만 따진다면 논문 쓸 건더기를 찾아다니는 기호학자들이나 좋아할만한 복잡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 자체는 격렬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어서, 도대체 이 영화가 뭔 말을 하는 건지 전혀 감잡지 못하는 관객들도 분명히 어떤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마야 데렌의 아름다운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후의 올가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 영화는 분명히 충격적입니다. 스토리야 아리까리하지만 어쨌든 그래요. 사실 [오후의 올가미]가 주는 충격은 구체적인 스토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구체적인 스토리와는 별도로 전개되어 가는 또다른 흐름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들을 감동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로 그 또다른 흐름입니다.

그 흐름이 꼭 의미있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음악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훌륭한 배우라면 '가나다라마바사아'만 읊어도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뛰어난 영화 감독이라면 빈 방만 이리저리 비추기만 해도 어떠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 흐름의 재료는 영화 음악, 배우들의 연기, 편집과 촬영 등이며 그 내용은 인간의 감정입니다.

형편없는 시나리오와 졸렬한 세계관을 가지고도 가지고도 근사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용이 알쏭달쏭하기만 한 영화를 보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왼쪽 뇌가 꾸벅꾸벅 조는 동안에도 우리의 오른쪽 뇌는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들어오는 감정의 음악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영화관에서 하염없이 감동만 하고 나오는 관객이라면 '깨어있는 관객'이 되라고, 할리우드 영화에 마취되지 말라고 옆에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 역시 그 사람들의 생각이 지당하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유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귀찮다면 한마디 해주세요. '나는 내용을 본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을 보았다'고요. 그 다음에 파스칼의 말 한 두 마디를 찾아서 그럴싸하게 인용한다면, 여러분의 하염없는 감동도 나름대로 이론의 근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95/09/1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