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프레스턴 스터지스 Preston Sturges

주연
조엘 맥크리....존 L. 설리번
Joel McCrea....John L. Sullivan
베로니카 레이크....여인
Veronica Lake....The Girl
로버트 워윅....르브랜드
Robert Warwick....Lebrand
윌리엄 드마리스트....존스
William Demarest....Jones
프랭클린 팽본....카살시스
Franklin Pangborn....Casalsis
포터 홀....헤이드리언
Porter Hall....Hadrian
바이런 폴저....볼딜
Byron Foulger....Valdelle
마가렛 헤이즈....비서
Margaret Hayes....Secretary
로버트 그릭....설리번의 집사
Robert Greig....Sullivan's Butler
에릭 블로러....설리번의 하인
Eric Blore....Sullivan's Valet
토빈 메이어....의사
Torben Meyer....The Doctor

(다들 내용을 아는 고전이지만 그래도 스포일러 경고는 달아야겠죠?)

1.

베로니카 레이크와 조엘 맥크리

예술가들은 우리 일상 생활에 직접 쓸모가 있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린 음식이나 옷, 집, 교통 수단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영화를 안 보거나 책을 안 읽는다고 특별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죠.

당연히 죄의식이 스며나올 법합니다. 특히 할리우드의 전문가들은 그럴만한 입장에 있죠. 과연 전쟁과 기아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벼운 오락 영화나 만드는 게 옳은 일일까요? 그들이 가진 예술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사회에 봉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정도만 달라질뿐이죠. [설리번 여행기]보다 40년 뒤에 만들어진 우디 앨런의 [스타더스트 메모리즈]에서도 주인공 감독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잖아요.

2.

[설리번 여행기]의 주인공 존 L. 설리번은 할리우드의 잘나가는 코미디 전문 감독입니다. 3,40년대를 살았던 다른 많은 예술가들처럼 설리번도 영화로 세상에 뭔가 공헌을 하고 싶습니다. 그가 만들려는 작품은 떠돌이 노동자들을 다룬 한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지금까지 돈 걱정없이 넉넉하게 잘 살아온 그로서는 도대체 떠돌이 노동자들의 고충이 어떤 지 알 수가 없었던 거죠. 해결책은? 그는 떠돌이로 변장하고 그들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설리번은 스터지스의 자화상일까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겁니다. 스터지스도 설리번처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교양있는 남자였습니다. 설리번처럼 그도 위트 넘치는 세련된 코미디로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요. [설리번 여행기]라는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그가 설리번처럼 이런 위치에 어느 정도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워너 사회물들처럼 직설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부유한 영화 감독이 떠돌이 생활을 체험하고 돌아와 그들을 진지하게 묘사하게 된다'는 내용 따위는 절대로 아니죠. 이 영화는 여전히 코미디입니다.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지요. 영화는 설리번과 그가 여행 중에 만난 이름없는 영화 배우의 로맨스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합니다. 설리번의 여행 역시 그의 모험을 홍보용으로 써먹으려는 영화사의 방해 때문에 그렇게 똑바로 흘러가지는 못하죠.

결정적으로 영화는 설리번의 여행 자체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리번의 여행은 사실 이 영화의 진짜 핵심이 아닙니다. 진짜 핵심은 여행을 마치고 이제 떠돌이들의 삶을 다룰 준비가 되었다고 우쭐거리던 설리번이 그들에게 돈을 적선하기 위해 떠돌이 복장으로 거리로 나왔을 때 일어납니다. 그는 돈을 노린 다른 떠돌이에게 강도질을 당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엔 역무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6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떠돌이로 변장한 영화 감독에서 진짜 떠돌이로 추락하고 만 것이죠.

이 영화의 메시지는 설리번과 다른 죄수들이 흑인 교회에서 미키 마우스 만화 영화를 볼 때 터져나옵니다. 지금까지 그가 겪은 고초에 넋이 나가있던 그는 플루토가 벌이는 소동을 보며 웃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놀라서 동료 죄수에게 묻습니다. "내가 지금 웃는 게 맞아?" 동료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웃어대는 동안 설리번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선심쓰듯 밑바닥 사람들에 대한 아카데미용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고, 그것이 그가 잘하는 코미디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여러분이 막시스트라면 이것과는 다른 결론을 냈을 수도 있겠죠. :-) 하지만 설리번의 각성은, 그가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위선을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산적입니다. 여기에 '고급 예술'을 떠나 대중적인 코미디를 선택한 스터지스 자신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도 잊어선 안되고요. 스터지스가 전쟁과 기아의 시대에 코미디를 만드는 일의 가치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감명 깊은 답변 중 하나를 낸 것은 분명합니다.

3.

[설리번 여행기]가 지금까지 사랑 받는 이유는 이 작품이 스터지스의 최고 걸작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레이디 이브]나 [팜 비치 스토리] 같은 작품들이야 말로 스터지스의 완벽한 진짜 걸작들이죠. 앞에 언급한 영화들에 비하면 [설리번 여행기]의 스토리와 구성은 비교적 엉성한 편입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The Bad and the Beautiful]처럼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의 심장을 찌르는 드라마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엔 너무 감상적이고 맘이 좋거든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바로 그런 불완전한 요소들이 이 영화를 더욱 감명깊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나칠 정도로 완벽한 그의 코미디 걸작들과는 달리 [설리번 여행기]엔 강한 개인적인 고백이 녹아 있습니다. 영리한 코미디의 황제가 자신의 날카로운 위트를 반쯤 접고 그의 심장을 열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덕택에 영화는 종종 앞뒤로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은 상당히 감동적입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 '완벽함'이 떨어진다고 해서 스터지스의 날카로운 감각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스터지스의 영리하고 우아한 대사들은 여전히 남아 있고, 대사 하나 없이 7분 동안을 밀고 나가는 설리번의 떠돌이 생활처럼 시원스러운 터치도 발견됩니다. 조엘 맥크리와 베로니카 레이크 역시 잘 활용된 배우들이며, 이 영화는 그들이 남긴 최고 걸작들 중 하나입니다. (02/05/14)

DJUNA

기타등등

1. 코엔 형제의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가 이 영화의 극중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2. 베로니카 레이크는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임신 6개월이었다는군요. 전체 몸매를 드러내는 부분이 별로 없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3. 베로니카 레이크 이야기 하나 더. 이 사람은 키가 가장 작은 클래식 할리우드 스타들 중 한 명입니다. 키가 150도 되지 않은 게 거의 확실해요.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힌 사람이라 다른 영화들에서는 작은 키가 그렇게 잘 보이지 않지만, 남장을 하고 나오는 [설리번 여행기]의 중반 부분을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작은 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