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강제규

주연
장동건....이진태
원빈....이진석
이은주....영신
공형진....영만
이영란....어머니
장민호....노역 진석
조윤희....유진
안길강....허중사
박길수....양중사
정진....임일병

진태와 진석

현대 한국 관객들에게 6.25사변이라는 소재는 굉장히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이나 이 소재는 뻔한 방식으로 끝도 없이 반복되었던 거죠. '한국 전쟁 영화'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거의 자동적으로 제목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국방부 홍보 영화 클립들의 조합을 떠올립니다. 아마 그 클립 속에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나 [피아골]과 같은 걸작들의 잔재들도 섞여있겠지만 그들도 이 모호한 조합 속에서는 지루한 클리셰의 일부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강제규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한 가장 큰 일은 6.25 사변이라는 낡은 소재에 '쿨함'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강제규는 자기만의 독특한 역사적 관점에서 그 시대를 해부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 시대가 아직도 현대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멋진' 영화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 뿐이죠.

[태극기 휘날리며]는 아주 간단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확장시켰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념과 사상은 거의 완벽하게 무시됩니다. 여기서 6.25 사변은 구체적인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모든 전쟁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전쟁입니다.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상황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몇몇 디테일을 제외한다면, 이 이야기는 다른 어떤 전쟁 이야기에 삽입해도 맞을 수 있습니다.

영화는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인 진태는 동생 진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종로 거리에서 구두 수선을 하며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진석은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가고 말죠. 그런 진석을 데려오려고 열차에 탔던 진태 역시 징집되고 말고요. 자신이 무공 훈장을 타면 진석이 제대할 수 있다는 걸 안 진태는 무모할 정도로 전투에 몸을 던지는데, 그러는 동안 그는 서서히 전쟁의 광기에 감염되고 진석은 변해가는 형의 모습에 몸서리를 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하려는 이야기의 기본 설정은 아주 좋습니다. 설득력있고 가치있는 진실을 담고 있지요. 이 설정은 팔기 쉽기도 합니다. 6.25사변과 한국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들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이야기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생살이 뜯겨져나가는 전쟁 속에 펼쳐지는 광기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설정의 가능성을 모두 활용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설정의 힘을 과신했던 것인지도 모르죠. 이 영화에서 설정은 그렇게까지 풍요롭게 흐르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계획된 노선을 따를 뿐이지요. 두 시간을 훌쩍 넘기는 러닝 타임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반복이 잦고요. 이 빈틈을 채울만큼 분명한 개성의 조연들이나 흥미로운 내용의 다른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련의 전쟁 장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단조로운 구성도 영화의 스토리를 깎아먹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폭력과 광기만 중요한 건 아니지요. 전투 전의 적막함도 중요하고 그 전쟁에 대해 더듬더듬 사색할 여유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엔 그런 여백이 없습니다. 가끔 삽입되는 평온한 장면들은 말 그대로 휴지기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이들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꾸미기 위해 동원한 수법들도 필요 이상으로 작위적입니다. 전쟁의 끔찍함을 강조하기 위해 초반에 삽입한 행복한 나날들의 묘사는 너무 결백해서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진태와 진석의 길이 갈리는 특정 클라이맥스의 장면의 설정은 지나칠 정도로 억지스럽게 느껴지고요. 여전히 직설적인 감동은 남아있지만,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 감동을 강요한다는 혐의를 쉽게 지울 수 없어요.

드라마의 부족함을 커버해주는 건 영화의 스펙터클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스펙터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 없죠. 강제규의 전작 [쉬리]가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 휘날리며]는 "할리우드가 할 수 있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다!"의 모토를 외쳐대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정말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스펙터클의 결과물이 지나치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닮아서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벤치마킹하는 것 자체를 나쁜 일이라고 몰아붙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영화가 교과서라도 되는 양, 노골적인 화면 질감과 핸드헬드 카메라의 활용까지 흉내낼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많은 모사들이 그런 것처럼, 이들은 '원본'에 비해 떨어지거든요. 특히 핸드헬드 카메라는 거의 남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충실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이라는 사건 고유의 질감이 그렇게까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고요. 이 영화의 전쟁은 그 피투성이의 지저분한 혼돈에도 불구하고 헬스 클럽에서 근육을 만들고 미용실에서 때빼고 광낸 뒤 찍힌 인공적인 스펙터클처럼 보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능숙하게 만들어진 '대작 영화'로, 분명히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설정의 힘이 강하고 만든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니까요. 그러나 이 영화는 진짜로 괜찮은 영화가 되기엔 지나치게 우직하고 사색의 여유가 부족합니다. 아마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또다른 선례를 남기기 위해 짊어져야 했던 의무감 때문이겠지요. (04/02/10)

DJUNA

기타등등

배우들, 특히 이은주의 얼굴을 보면서 50년대 사람들의 치열이 저렇게 고왔을 리가 없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습관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