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헤수스 프랑코 Jesus Franco

주연
솔레다드 미란다....나딘 카로디 백작부인
Soledad Miranda....Countess Nadine Carody
에바 스트룀베르크....린다 웨스팅하우스
Ewa Strömberg....Linda Westinghouse
안드레스 모날레스....오마르
Andrés Monales....Omar
데니스 프라이스....슈어드 박사
Dennis Price....Dr. Seward
폴 뮬러....스타이너 박사
Paul Müller....Dr. Steiner
하이드룬 쿠신....아그라
Heidrun Kussin....Agra
헤수스 프랑코....메메트
Jesus Franco....Memmet
호세 마르티네스 블랑코....모르포
José Martínez Blanco....Morpho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나딘과 린다

헤수스 프랑코를 영화사에 길이 남는 인물로 만든 건 순전히 그의 생산성입니다. IMDb에 따르면 그가 1950년대말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십가지 가명들을 써가며 감독한 영화들을 모두 합하면 180편이나 됩니다. 그는 그 많은 영화들에서 제작자였고 작가였고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작품수만으로 거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프랑코는 결코 마리오 바바와 같은 거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스페인의 남기남에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그는 저예산으로 빨리 찍는 방법을 알고 그 속사포와 같은 작업 환경 속에서 가끔 꽤 쓸만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방법도 압니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그저 그렇지만 180편이나 수다스럽게 뽑아내다보니 몇 편은 꽤 그럴싸한 컬트 히트작이 되었답니다.

프랑코의 적중률이 가장 높았던 때는 그가 성인 취향의 에로틱한 호러 영화들을 만들던 6,70년대였습니다. 그 중 가장 자주 기억되는 작품들은 포르투갈계 스페인 배우 솔레다드 미란다에게 수잔 코르다라는 예명을 붙여주고 주연으로 내세워 찍었던 리히텐슈타인과 서독 영화들이죠. 오늘 소개할 [밤피로스 레스보스 Vampyros Lesbos: Die Erbin des Dracula]는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내용을 성전환해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 위에다가 유니버설 호러 영화 [드라큘라의 딸]의 몇몇 설정들을 양념처럼 얹었지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탄불의 법률 회사에서 일하는 변호사인 린다 웨스팅하우스는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나딘 카로디 백작부인의 섬을 방문합니다. 물론 나딘은 뱀파이어였고 나딘에게 물린 린다는 다음 날 기억을 잃은 채 보트에서 발견되지요. 여기서부터 린다의 남자친구인 오마르와 초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슈어드 박사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대충 어디를 가져왔는지 짐작하시겠죠? 나딘 카로디 백작부인은 여성판 드라큘라입니다. 린다는 미나나 루시와 같은 여성 희생자와 조나단 하커를 결합한 인물이고요. 나딘은 잘레스카 백작부인처럼 자기를 짝사랑하는 남자 하인을 거느리고 있고 인간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에는 렌필드에 해당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슈어드 박사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아그라라는 여자지요.

원작과 이 영화의 차이점은? 나딘이 노골적인 동성애자라는 것이죠. 당시엔 동성애자들이 정신적 상처를 입은 피해자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프랑코도 그런 핑계를 하나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따르면 나딘 카로디는 남자들을 혐오하는 강간피해자입니다. 전쟁 때 군인들에게 겁탈당하는 나딘을 지나가던 드라큘라 백작이 구출해준 뒤 나중에 같이 살았나 봐요!

프랑코는 나딘을 상당히 동정적인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건 이런 종류의 레즈비언 흡혈귀 영화를 만드는 남성 감독들이 종종 취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는 위선일 거고, 어느 정도는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일테고, 어느 정도는 차마 예쁜 여자 캐릭터에게 매정한 악역만 시키고 싶지 않아서겠지요.

결과는 꽤 재미있습니다. 여자 뱀파이어가 주인공인 영화지만 여전히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기존 성역할에 따라 선악 구분이 되어 있거든요. 피해자=여성, 가해자 남성의 공식 말입니다. 나딘은 가끔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에 빠져 있는 로맨틱한 주인공입니다. 린다나 아그라는 선한 피해자이고 로맨틱한 연인들이고요. 하지만 이 영화의 슈어드 박사는 환자들을 학대하는 냉정한 사디스트이고 아그라의 남편 메메트(프랑코 자신이 이 캐릭터를 연기합니다)는 여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미치광이 살인마입니다. 그나마 괜찮은 인물로 묘사되는 남성 캐릭터는 나딘의 벙어리 하인 모르포 뿐이에요.

그러나 줄거리나 메시지 때문에 프랑코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비교적 이야기에 신경을 쓴 티가 나지만 [밤피로스 레스보스]의 각본은 여전히 엉성합니다. 로맨스도 존재한다고 우기고만 있을 뿐 정말로 구체화되는 일은 없고요. 아무리 유난을 떨며 관대한 척 굴어도 이 이야기가 여전히 남성 관객들을 위한 에로티카라는 사실도 바뀌지 않아요. [밤피로스 레스보스]에서 중요한 건 [드라큘라]를 엉성하게 흉내낸 줄거리가 아니라 그 스타일입니다.

[밤피로스 레스보스]는 한마디로 '그루비~~~'합니다. 6,70년대 팝문화의 그 노골적인 원색성이 약간 기형적인 미적 감각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이죠. 그 감각은 핏빛으로 가득한 세트 디자인을 통해 발산되기도 하고 호러 영화 사상 가장 어처구니없는 영화 음악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여기엔 정말로 70년대 풍인 솔레다드 미란다의 미모도 한 몫 하는 듯 해요.

영화는 노골적인 상징들로 가득하기도 합니다. 가끔 아무 상관도 없이 등장하는 연과 전갈의 이미지가 대표적이죠. 모두 나딘의 상징입니다. 전갈은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자명하고, 빨간 연은 피의 이미지와 박쥐 이미지를 적당히 결합시킨 것이겠죠. 여기에 이유도 없이 창문에 흘러내리는 핏방울의 이미지가 끼여들면 이 영화의 그림은 완성됩니다. 이것들은 의미만 따진다면 별 대단한 가치가 없지만 워낙 뻔뻔스럽고 대담하게 삽입되어 은근히 강렬한 효과를 냅니다.

이런 것들은 종종 한자리에 모여 그럴싸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해내기도 합니다. 나딘의 마네킹 쇼가 대표적인 예일 거예요. 나딘이 무대 위의 마네킹에게 서서히 생명을 불어넣고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난 희생자의 피를 빠는 이 쇼는 기대 이상으로 창의적이고 가끔 인상적이기까지 합니다.

[밤피러스 레스보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걸작은 아닙니다. 컬트 클래식이긴 해도 그게 이 영화의 질을 증명해주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프랑코의 거칠거칠하고 뻔뻔한 연출이 70년대 초의 괴상한 미감과 결합한 결과는 꽤 생산적입니다. 이 역시 전적으로 프랑코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쩌다 발생한 조합인 듯 하지만요. 당시 그의 적중률이 높았던 것도 우연히 맞아 떨어진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죠. (03/06/04)

DJUNA

기타등등

나딘 카로디라는 이름은 배우 존 캐러다인의 이름을 살짝 비튼 것이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