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0 05:35
콘서트를 자주 가는 편인데 어떤 콘서트는 생각한 것 보다 너무 좋아서 기억에 남는 경우도 있고,
어떤 콘서트는 별로 좋아하는 밴드/가수는 아닌데 친구가 가니까 같이 갔는데 그나마 별로 좋지도 않아서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일년에 크고 작은 쇼를 20번 정도 보는데 그 중에 너무 좋아서 기억에 남는 경우는 한 3개 정도 될까요?
그 중에 4년 전쯤 갔던 쇼는 회사 동료/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간 경우인데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요.
쟈니 플린이라는 별로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은 포크 음악을 하는 사람인데
같이 간 동료가 굉장히 좋아해서 저도 따라 갔어요.
뭐 목요일 밤인데 할 일도 별로 없고, 포크에는 전혀 관심없지만, 그 쇼를 하는 공연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굉장히 작은 공연장인데 꽉 채우면 한 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날 밤에는 많아봐야 한 5~70명 정도의 사람 밖에 없었어요.
무대에 오른 쟈니 플린은 너무 예쁘장하게 생겨서 내 동료가 정말 저 사람의 음악을 순수하게 좋아한 걸까 의심해보기도 하고.
공연장이 너무 열악해서 밖에서 튼 음악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도 해서 쟈니 플린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공연을 이어갔는데
밤 12시가 다 되어 시작한 그 공연에서 또 다른 회사 동료를 만났어요.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가끔 같이 일을 하기도 하는.
같은 부서의 여자 동료와 결혼해서, 3살짜리 예쁜 딸이 있는 동료인데 일 잘하고, 성격도 좋고, 취미로 맥주도 만드는데
그 맥주가 또 더할 나위없이 훌륭하고 거기다가 마라톤까지 가끔 뛰는 그런 남자 동료예요.
우리는 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어요.
포크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저는 조금 무료하게 공연을 보고 있었는데
중간에 쟈니 플린이 자기 친구가 투어에 함께 왔는데 같이 잼을 해보고 싶다고 하며 관객 속에 끼어있던 친구를 무대로 불러올린
그 순간 공연장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어요.
그 친구와 2-3분 동안 주거니 받거니 코드를 알려주고, 음정을 맞춰보다가 곧 같이 연주를 시작했는데
그게 그 날의 하이라이트였거든요 저한테는.
오랜 친구인 두 사람이 음악을 통해 즉석에서 교감을 나누고 뭔가를 만들어가는 장면.
제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부러움과 감탄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장면이거든요.
그래도 목요일 밤에 여기까지 온게 헛수고는 아니었구나하고 공연을 마치고
쟈니 플린한테 싸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회사 동료를 봤어요.
위에 남자 동료가 결혼한 후, 그 부인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고 그 자리로 새로 온 여자 직원인데
멀리서보면 그 부인인가 싶을 정도로 둘이는 닮았어요. 자그마하고 마른 체구에 붉은기 도는 금발머리.
싸인을 받고 집에 오면서 제 동료와 저는 왠지 가슴이 두근 두근 했지만 별 말하지 않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회사에서 열린 야유회에 위의 남자 동료의 부인이 혼자 딸을 데리고 온 걸 봤습니다.
그리고 더 나중에 둘이 이혼하고, 남자 동료는 쇼에 같이 왔던 여자 동료와 약혼을 거쳐 결혼을 했고,
좀더 나중에, 이혼한 전 부인은 재혼해서 다시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
쟈니 플린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타를 잘 치던 그 청년이 멈포드 앤 손즈의 마커스 멈포드였다는 걸 알게되었어요.
제가 포크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멈포드 앤 손즈의 공연을 두번이나 본 후에요.
지금도 회사에서 남자 동료를 가끔 보면 그 날 밤의 콘서트가 생각나요.
유투브에는 역시 없는게 없네요. 그날 쟈니 플린과 마커스 멈포드가 같이 공연하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ocRMGHRCPM
2014.04.10 15:22
2014.04.10 22:40
-마커스 멈포드, 처음 봤을 때 눈빛이 너무 순수하지 않게 보여서 인상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아네스 바르다'의 '행복' 보고 싶네요 기회가 닿으면.
-정리가 안되서 굉장히 어수선하게 길게 쓴 글인데 새벽길님의 댓글을 보니 훨씬 짧은 글 안에도 그 모든 걸 담을 수 있네요. 효과적으로 글 잘 쓰시는 분들 부럽습니다.
- 외모때문에 Laura Marling을 좋아하다가 Marcus Mumford를 알게 됐지요.
- 제가 좋아하는 Laura Marling을 사귄적이 있고, 역시 좋아하는 Carey Mulligan과 결혼한 지라, 멋진 놈인가 보군. 이란 생각은 했지만,
- 음악이 토속적이라 비록 진지한 음악인이지만 큰 성공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작년 그래미수상을 보고, 그래미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 10여년전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첫 개인 콘서트에 갔는데, 게스트로 나온 송창식과의 잼 연주가 본 공연을 압도해버렸던 경험도 기억나네요.
그리고 그 공연의 또 다른 게스트인 어떤 분이 대학시절 제가 아주 좋아했던 시인과 촌장의 '얼음무지개'를 불렀는데 '그'가 누군지 몰랐다가
작년에 장필순 콘서트에 가서 싸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있다, 근처에 '그'처럼 생긴 분이 있길래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그가 답해주더군요. 맞다고. '그'가 고찬용이더군요.
- 직장 동료 부분은 짧은 필름같네요. 여운이 있는. 비약이지만,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 '행복'을 오랫만에 떠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