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3 21:12
인생의 반을 떠돌며 살고 있는 자라(이사 회수가 최소 스무 번은 넘은 거 같습니다) 물건에 대한 애착이 평균보다 좀 떨어집니다만, 아주 가끔은 딱히 큰 효용이 없는-하지만 있으면 괜히 뿌듯할 것 같은- 물건을 사들이고 싶은 충동이 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끼는 물건이 된 것들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도 안 되지만 여튼 늘어놓아보자면, 태국 애로우사의 양철제 연필깎이, 수공예로 만든 샤또라기올의 와인따개, 비알레띠의 브리카 모카포트 정도가 있고, 작년에 가장 따끈따끈하게 소장품이 된 터키쉬 커피밀과 이브릭이 있습니다.
오늘은 불금, 듀게의 글리젠이 느려지는 시간이죠. 약속까지는 좀 시간이 있고 잉여력은 언제나처럼 넘쳐나므로 한동안 잠자고 있던 애장품을 꺼내 터키쉬 커피를 한 잔 만들어 먹고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의 것이 터키쉬 커피밀, 뒤의 것이 이브릭 혹은 체즈베라 부르는 커피냄비(?)입니다. 커피밀은 사실 커피전용은 아니고 후추 같은 향신료 빻는 용도로도 쓰입니다. 현지에 안 가봐서 잘 모르긴 해도 저걸로 가정이나 커피점에서 커피를 만들진 않을 것 같아요. 한명분 커피 16그램을 갈기 위해 최소 10분은 투자해야 하거든요.
커피밀에 커피를 넣었습니다. 앞쪽에 보이는 연두색 알갱이는 카르다몸입니다. 기왕 힘들게 커피 만들어 먹는 김에 한껏 이국적으로 먹어봐야죠. 전 커피 16그램일 때 딱 커피알만 한 거 두 알이면 적당하더군요.
터키쉬 커피의 관건은 커피가루의 입도입니다. 에스프레소보다 더 곱게 밀가루처럼 부드럽게 갈아야 하는데, 일반 가정용 수동 그라인더로는 엄두도 못 내고, 영업장용 버 그라인더도 기종에 따라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저는 되는 기종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세팅을 원상복귀시키기 귀찮아 그냥 수동밀로 갈았습니다. 시간도 많은데요 뭐.
인고의 15분이 지나 커피를 다 갈았습니다. 다음 번에 언제 또 다시 이 짓을 할 뽐뿌가 올까요. 이브릭에 상온의 물 100ml, 커피 16g, 그리고 설탕 두 스푼을 넣었습니다. 당연히, 설탕은 취향입니다. 평소에는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에 설탕 절대 넣지 않고 먹는 차도남입니다만 터키쉬 커피에는 왠지 달큰한 향이 나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휘저어 줍니다. 설탕이 다 녹고 덩어리진 커피가 없도록요. 그리고 끓이는 동안에는 절대 젓지 않도록 합니다.
중불에 올려서 끓입니다. 한 순간에 끓어넘칠 수 있으니 딴짓하지 말고 열심히 봐야 합니다.
요래요래 끈적한 거품덩어리(누구는 이게 크레마라던데 제가 보기엔 일부만 크레마고 나머진 좀 다른 성질의 거품 같아요)가 올라와서 넘칠락말락할 때 불을 끄고 잠깐 뜸을 들입니다. 한 30초쯤 후에 다시 불을 켜고 거품을 또 한 번 올려준 다음 바로 끄고 불에서 내려 이번엔 2분간 휴지. 커피가루를 가라앉혀서 잔으로 들어가는 양을 최대한 줄이려는 겁니다.
데워둔 데미타스에 살살 부어줍니다. 어디선 이브릭을 최대한 높이 들어서 커피를 호쾌하게 들이부어야 크레마 유지에 좋다는데 전 그정도로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사진 찍느라 두 번째 거품 올리는 과정에서 좀 너무 많이 끓여버렸더니 오히려 거품이 죽어버렸습니다. 원래는 훨씬 부드러운 조밀한 거품이 가득 차 있어야 되는데. 뭐 여튼 -ㅅ- 이게 완성샷이에요. 맛은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천천히 또 시간을 두고 마십니다. 안그러면 저 커피가루를 다 먹게 되거든요. 커피잔에 남은 가루의 모양으로 운세를 점친다는 말도 어디서 주워들은 거 같은데 모르니까 그냥 좋은 걸로 치고 넘어가죠.
적당한 타이밍에 글을 마칠 수 있었네요. 설거지(터키쉬 커피는 설거지가 또 ㅈㄹ입니다. 가루를 개수대에 버리자니 쌓여서 막힐까 찜찜하고 쓰레기통에 버리자니 잘 안 떨어지고...)를 못했지만 뭐 술 한 잔 하고 오면 알딸딸한 기분에 쉽게 해 치울 수 있겠죠. 불금은 즐겁게들 보내시나요. 전 고기 먹으러 가요.
2015.03.13 21:25
2015.03.14 10:45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2015.03.13 21:27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는 저 수고스러움이라니.. 제 취향이네요. 엔틱한 모양도 어쩜..
그나저나 터키에서는 커피를 대접할때 그 사람한테 호감이 있는만큼 설탕의 양을 조절한다던데 사실인가요
2015.03.14 10:57
저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그라인더의 밑바닥에 ISO9001 이라 적혀 있는 건 좀 아이러니하죠. ㅎㅎ
호감이 많으면 설탕도 늘어나는 걸까요? 언젠가 터키를 가게 되면 꼭 알아봐야겠어요.
2015.03.13 21:33
커피 찌거기 무서워요 저도 번거롭다고 그냥 개수대에 버리다가 그만 막혀서 뚫느라 팔만원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신경써서 음식쓰레기통에 분리 종이 필터 여벌 있으시면 물 부어서 거기 따라뒀다가 필터채로 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2015.03.14 11:15
저도 에스프레소머신에 연결된 배수구가 막혀서 난감했던 이후로 커피찌꺼기 버리는 걸 굉장히 신경쓰게 됐어요. 드립용 필터도 대안이 되겠네요. 설거지에 필터까지 뭔가 꽤 소모적인 느낌이 들지만 말이죠. ;-;
2015.03.13 21:59
2015.03.14 11:16
수십 년간의 포도주와 커피에 대한 탐닉으로 이미 착색된 저의 이빨이 불쌍하네요...ㅠㅜ
2015.03.13 22:08
2015.03.14 11:17
커피를 터키말로 카흐베(Kahve)라고 한다는군요. 뭔가 멋져요.
2015.03.13 22:18
2015.03.14 11:27
2015.03.14 09:47
한잔에 저런 정성이 들어가는 커피라면.. 진정 애호가...
저도 마셔보고 싶습니다.. 책으로만 봤던 터키쉬 커피 ㅎㅎ
2015.03.14 11:41
애호가라기보다는 시간이 철철 남아도는 잉여라 해두죠. ㅎㅎ 서울이라면 어느 한 구석에 터키쉬 커피 파는 데가 있을 것 같은데요. 홍대 근처 어디서 먹어본 듯도 하고...
2015.03.14 11:13
전 직장 다닐 때, 터키 출장을 갔었는데 거래처에서 대접해 준 커피마다 하나같이 깜짝 놀랄 만큼 달아서 이건 뭔가 했는데, 그건 호감이었을까요? 비호감이었을까요? 그리고나서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한 거래처로부터 저는 늘보만보님것과 비슷한 터키쉬 커피도구 일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번거로운 과정을 제대로 습득할 리 없는 저에게 그것은 그냥 장식품;;;
2015.03.14 12:03
저 같으면 일단 호감으로 생각할 거예요. ㅎㅎ 맘대로 편한대로죠. 누구든 번거로운 일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저는 이런 일에서는 번거로움보다 어떤 종류의 사소한 기다림을 즐기는 것 같아요. 15분간 팔이 빠져라 커피밀을 돌리다 갑자기 공회전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라든지, 하염없이 불위의 커피를 바라보다 어느샌가 거품이 푸푸푸 올라오는 순간이라든지 말이죠. 아주 소소한 성취감이랄수도 있겠네요.
2015.03.14 16:25
그나저나 터키쉬 커피에 대한 글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전부터 궁금하던 베트남커피핀을 샀습니다(글쓴 분이 동남아 계시는 것 때문에 생각났을까요;;). 화요일이면 도착해서 맛볼 수 있겠죠. 터키쉬 커피보다는 베트남 커피가 만들기 쉬운 것 같던데
2015.03.14 18:07
글쵸, 베트남 커피는 걍 드립이잖아요. 커피 양이랑 굵기에 따라 물 떨어지는 속도가 달라지니 것만 잘 맞추심 되죠. 진하게 내린 커피에 연유를 넣었을 때의 실키한 느낌이 좋아서 저도 종종 먹습니다. 저의 킥은 여기에 아주 미량의 소금을 섞는 거예요. 한 번 시도해 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