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8 11:51
얼마 전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의 마크 로쓰코(Mark Rothko)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오후 3시 좀 넘어서 전시장에 들어가니 마침 도슨트 분의 설명이 시작되어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어요.
설명을 미리 들으면 제 상상력에 금이 갈 것 같아서 ^^ 그냥 패스하고 전시장을 휙휙 둘러봤죠.
사람이 제법 많은 편이어서 시야가 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림을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날은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었고 저녁 6시부터 반값에 전시를 볼 수 있으니
오후 5시경엔 전시장이 텅텅 비게 될 거라 기대하며 4시 30분 정도까지 그냥 빈둥빈둥 놀았어요.
(누가 5시에 제값 내고 전시장에 들어오겠어요. ^^)
사실 처음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어요. 휴스턴의 로쓰코 채플에 있는 그림 6점을 가져온 줄 알았는데
거기 전시된 그림 50여점은 모두 워싱턴의 National Gallery of Art에서 가져온 거였 거든요.
(인터넷 한가람 미술관의 전시 소개에는 <로쓰코 채플>이라는 섹션이 있다고 소개해 놨는데
실제 로쓰코 채플에 있는 그림이 아니라 비슷한 느낌의 그림을 전시해 놓은 거였어요.)
그리고 조명을 너무 어둡게 해 놨더라고요. 검은색인지 갈색인지 자주색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나중에 알고 보니 로쓰코가 그런 조명을 원했다고 하는데 저야 뭐 그런 걸 알 턱이 없으니...)
전시 공간도 상당히 비좁고 천장도 낮고 답답한 느낌이어서 제가 원하는 휑한 미술관의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원했던 건 이런 공간이죠.)
아름다운 풍경도 기분이 좋아야 멋있게 보이는데 제 기분이 별로니 그림들이 다 시시해 보이더군요.
로쓰코의 그림에서 기대했던 숭고함이랄까, 영원이랄까, 무한이랄까, 이런 게 전혀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냥 가긴 억울해서 제가 그림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적한 분위기가 될 때까지 한번 기다려보자고 생각했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오후 4시 30분이 지나니까 전시장이 휑~해지기 시작하고 제 마음도 덩달아 고요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로쓰코 채플>로 꾸며 놓은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림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죠.
그 방의 정면에는 그림 전체가 온통 시커먼 그림이 걸려있어요.
(이런 그림이었는데 그림들 제목이 다 '무제'여서 정확한 그림을 찾기 어렵네요.)
처음 봤을 때는 화딱지가 났죠. 그림을 온통 시커멓게 칠해놓으면 어쩌자는 거냐는 생각에다
어둠침침한 조명 때문에 갈색인지 자주색인지 검은색인지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신기하게 왼쪽 벽에 걸려있는 검은색 네모 + 회갈색 네모로 이루어진 그림을 한참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슬퍼지는 거예요.
(왼쪽 벽에 이런 그림이 2장 걸려있었어요.)
마치 검은 하늘과 회갈색 땅, 검은 바다와 모래사장을 보는 것 같은데
하늘이 캄캄하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을 이런 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갈 곳이 없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느낌, 검은 하늘이 짓누르는 느낌이 덮쳐오면서
캔버스를 이렇게 검은 색으로 채워버리는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화가에게는 캔버스가 그가 보여주고 싶은 세상의 전부일 텐데요.
갈 길을 못 찾아 앞이 콱 막힌 사람, 검은 색의 무게에 짓눌린, 죽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정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요.
왼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갑자기 감정이 솟아오르니까
정면에 걸려 있는 갈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온통 시커먼 그림들조차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희미한 노란 조명이 시커먼 그림의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비춰서 어슴푸레한 갈색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는데
제 눈에는 마치 캄캄한 곳에 있는 사람의 눈에 멀리서 정체모를 뿌연 빛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희망까지는 아니지만 완전한 암흑은 아닌, 무엇인지 볼 수는 없지만 동굴처럼 희미하게 길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뭐,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데 벌써 5시가 지나서 그 다음 방으로 갔어요.
왼쪽 벽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주황빛의 불이 붙은 듯한 사각의 문틀(?)이 그려진 그림이 있었어요.
가까이 가면 몸에 불이 붙어버릴 것 같은 꽤 좁은 문같이 보였어요.
저기를 뛰어넘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저 너머에서 기다리는 것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열려있는 동시에 막아서는, 불타는 문이 주는 두려움과 고통이 느껴지면서 호기심도 조금 생기고요.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그런 주황빛 문이 2개가 그려져 있는 듯한 커다란 그림이 있는데
이건 마치 어느 문으로 지나갈 것인지 선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왼쪽 문을 통과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고 오른쪽 문을 통과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생각했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로쓰코 채플의 바로 앞 방으로 갔어요.
왼쪽 벽에 걸려 있는 오렌지색 네모+ 노란색 네모가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이 화가의 마음은 항상 이렇게 분열되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그림은 이상하게 인터넷에서 못 찾겠네요. 비슷한 색깔의 그림들은 보이는데...)
.
노란색 네모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오렌지색 네모 속으로 침투해 가려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는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깨끗하게 나뉘어지지 않은 두 공간, 섞이고 싶지만 섞이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는 마음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2015.03.28 13:34
2015.03.28 15:42
2015.03.28 16:32
다른 그림도 그렇겠지만 로쓰코 그림은 특히 휑한 데서 조용하게 봐야 뭔가 느껴질똥 말똥 할 것 같아서
거기 계시는 분께 언제 제일 사람이 없냐고 여쭤보니 문 닫기 1시간 전이 제일 사람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오후 8시에 문을 닫는데 7시 20분부터는 입장 불가니 아무래도 그 때 제일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문 여는 오전 11시부터 1시 정도까지도 별로 사람이 없다고 하시고요.
사실 제가 보길 원했던 커다란 그림들은 별로 없었어요. 워싱턴 National Gallery of Art가 소장하고 있는
로쓰코의 그림에 어떤 게 있나 미리 알아보고 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페리체 님이 알려주신 파스타 집과 다른 분이 알려주신 쌀국수 집에 가보고 싶어서
예술의 전당에서 무슨 행사하면 한 번 더 갈 것 같아요. ^^
2015.03.28 16:27
한가람 미술관은 갈 때마다 느끼는게....너무 조명이 어둡구나 입니다. 그림에 조명이 비춰져서 반사되는 번뜩임 때문에 그림을 잘 못보게 될 때도 있었고..(아마 전시 표준이 있겠죠..전시 조건이라든지) 그리고 너무 답답하고...그중에서 젤 싫은건...관람객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자유롭게 앞뒤로 돌아다니며 보는게 맞는거 같은데...줄서는 문화가 미술관에서는 필요 없을텐데 참 이상하죠...(일전에 간송 미술관에서는 전시 테이블을 관객들이 뺑 둘러싸고 있어서 뒤쪽에서 까치발로 본듯 만듯한 경험이 있습니다) 인기 있는 전람회를 열기에는 한가람 미술관 규모가 너무 작지않나 싶습니다.. 지을때 좀 넓직넓직 시원하게 지을것이지.. 자연채광도 좀 할 수 있도록...
2015.03.28 16:42
미술관은 정말 공간 확보가 필수적인 것 같아요.
좁고 북적북적하면 그림을 볼 마음 상태가 안 돼서요.
(예전에 간송미술관 한번 갔다가 아주 학을 뗐죠. ^^
잘 보관해서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긴 하지만요)
한가람 미술관은 관람객이 많은 시간대를 피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2015.03.28 23:18
한가람에서 한다하면 엥간하지 않은 한 안가는데....읽자니 ....땡깁니다...그러나 나는 지방 사는 인간.
지방에 내려오니 다 좋은데 요 전시나 기타등등의 문화방면 인프라가 서울에 비해 현저히 낮아 그게 정말 불만이에요.
그렇다고 시간내 서울 오가자면 전시회비보다 몇곱절드는 교통비. 길에 버리는 시간....아하.......ㅜㅜ 시간조차 안나지만.
2015.03.29 01:14
저는 경기도민인데 서울 북쪽 동네에 가려면 왕복 4시간은 걸려서 그냥 안 가게 되더라고요.
이번 전시는 그나마 서울 남쪽이고 직통 지하철이 있어서 수월하게 갔다 왔지만요.
앞으로도 서울까지 가서 그림 볼 일이 얼마나 될까 싶긴 한데 ^^
이번 같은 추상화 전시회에는 가끔 가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림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그림을 매개로 하여 제 자신이 무엇을 떠올리고 느끼는지
지켜보는 게 꽤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너무 효율이 떨어져서 문제긴 하지만요.
(3시간을 들였는데 제멋대로라도 뭔가를 떠올리고 느꼈던 그림은 겨우 4~5점이 될까 말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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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달리기 힘든 글인 것 같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자급자족 댓글이에요. ^^
어제 Ida 사운드트랙 들으며 맘에 드는 곡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몇 곡
Fred Buscaglione - Love in Portofino
Alfred Brendel - Ich Ruf Zu Dir Herr Jesu Christ (J.S. 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