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분이 육아의 힘듦에 대해 쓰셨는데,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계속 그 모습만 달리하는 것일 뿐 아이를 가진 그 순간부터 나만의 생활이란 것은 영원히 없는 거나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제목에도 썼다시피 현재 해외에 살고 있습니다. 올해 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내년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남편 회사에서 일정 조정이 있을 수 있단 말이 나오고선 다시 아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좀 불안정한 상태죠. 무얼 하려고 해도 망설이게 되고, 하지 않으려고 해도 망설이게 되는... 


  아이는 만 13살이고 사춘기가 빨리 온 편이에요. 외동이고 남자 아이치고 저랑 이야기도 많이 하고 해서 사춘기로 힘들 줄 몰랐다가 작년부터 아예 폭탄을 맞고 집안도 몇 번 뒤집어지고, 아직도 간혹 저의 눈물 바람이 이어집니다. 하하. 그런데 이건 정서적인 변화예요. 그러니까 힘들지만 다른 아이들도 다 겪고, 다른 부모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 겪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좀 낫습니다. 더 힘든 건 말이죠, 아이의 정신적인 부분입니다.


  아이가 초등 3학년 1학기만 겪고 해외에 나왔습니다. 영어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 특히 아이가 있는 학년엔 한국인이 없습니다. 작년에 사춘기가 심하게 오고부터는 제가 아이 교우 관계에 신경을 좀 많이 써서 친구들 사이도 원만한 편입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서양 애들이구요.


  그런데 점점 아이가 겉모습만 한국인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한국어가 좀 서투니 이해하자 싶어도 이야기하는 도중에 아이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라고 내뱉으면 제가 얼굴이 굳어져요. 그 말이 무례하다고 하면 이해를 못합니다. 설명하려고 들면 한국 사회가 너무 답답하다고 느낍니다. 제가 받는 느낌은 아이가 영어를 한국어로 직역해서 한다, 그러니 높임법이나 돌려 말하는 게 전혀 없고, 나는 상처를 받는다. 그걸 지적하면 아이는 이해를 못한다는 거죠. 그러니 같은 말을 써도 언어의 형식만 같을 뿐 속은 서로 외국어를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엄마와 나는 대등한 관계이니 나에게 뭘 하나 시키면 나도 당연히 엄마한테 시켜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금 저녁 식탁 분위기가 굳구요. 얼마 전에는 일제 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혜택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더니 "엄마는 감정적으로 싫어하겠지만, 사실 그게 맞는 말 아닌가요?"라고 해서 정말 분위기가 얼어붙은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맹목적으로 서양을 외치고 살아온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생각보다 두 문화와 언어를 모두 아우르게 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더라구요. 저도 나름 객관적으로 두 세계를 보려고 하고 아이 시야를 넓혀주려고 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게 결국은 제가 생각하는 기본 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즉, 기본적인 한국 정서, 예의, 공경, 한국 역사에 대한 비슷한 시각 등등을 갖춘 채 다른 세계를 보는 자세... 하지만 눈 앞에 있는 건 전혀 내가 예상한 모습이 아닌 거죠. 감정적인 이유 이외에 이걸 나쁘다고 이야기 할 근거도 잘 모르겠구요. 아이는 제가 혼란스러워하고 가끔 화내는 걸 이해 못합니다. 친구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거죠. 그 사람들이야 다국적, 다문화가 기본이니 한국보단 나을 겁니다. 아이를 기르며, 제가 얼마나 나에 대해 자신했고, 오만했는지 계속 확인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너무 괴로워서 소리치며 운 적도 꽤 되요. 하지만 실컷 울고 나면 아이를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고 나가는 게 이렇게 힘든 과정이구나 싶습니다. 정말 살을 찢어내다는 표현을 알 것 같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은 아이와 사이가 좋습니다. 그리고 지금 혼란스러워 할 때인 것도 이해하구요. 그렇지만 막상 이런 일들이 직접 일어나게 되면 준비되지도 않은 내가 한국의 석학들도 대답해 주지 못하는 문제에 답을 해야 되는가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생각이 다 든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자랐다면 정체성 문제는 없었겠죠. 제가 볼 때 아이는 본인이 한국인인지 서양인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서양인이 되고 싶지만 되지 못해서 한국이 싫은 건가 싶습니다. 저는 아이가 한국인이면서 서양의 도구를 가지기를 원했고, 그건 제 욕심이었던 듯해요.


  아마 해외에서 자녀를 기르는 분들은 저랑 비슷한 고민을 했거나 이미 하셨을 수도 있겠죠. 한 아이를 온전한 어른으로 키워내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건 부모가 또 홀로 서는 과정인 것도 같아요. 듀게에 계시는 모든 부모님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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