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한거에요

2015.11.28 17:57

Kaffesaurus 조회 수:2302

시작은 5월 그가 타이완에서 돌아와서 그곳에서 뭘 했는 가 이야기해 준 때였다. 그의 계약에는 1년간 3, 4번 타이완에 돌아간다는 것이 있다. 우리가 만난 지 두달 겨우 지났을 때, 아직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겠을 때, 그는 타이완에 다녀왔고 그곳에 있는 동안 우리는 거의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돌아온 첫 주말 이었던가, 함께 점심을 먹고 타이완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일, 일, 일,  친구들과 마작하기) 이야기 하던 그는, 여름에 형을 만나러 미국가는 것 준비도 했다고 했다. 형수가 이것 저것 사다달라고 하는 게 있어서 그걸 사러 다녀야 했다고 말하던 그는 그 이것 저것이 뭔가를 또 설명했다. 나는 왠만하면 없는 건 없는 데로 있는 거 있는 데로 살자주의이고, 사실 미국에 없는 게 뭐가 있나 하는데,  여행가방 하나를 다 채웠다는 말을 살짝 뭐 그렇게 까지 사람을 귀찮게 하나 싶은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가 엄마가 아니어서 그런가, 분유사달라는 건 좀 이해가 안가요 라는 말에 나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곧이어서 그렇지만 조카 방 데코레이션 할 붙이기를 산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그게 뭔지 잘 몰라하는 나를 보고는 인터넷을 찾아 벽장식 붙이기를 보여준 그. 내가 워낙 집 장식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처음 보는 것들 이었다. 너무 예쁘다 라고 하면서 인터넷 페이지를 돌리던 나한테 특히 가로등과 고양이가 있는 게 맘에 들었다. 


그가 미국 형의 집을 다녀온 여름 끝자락, 두달 가까운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온 그는 앞으로 두달이 되기도 전, 다음 타이완 출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 그를 나의 남자친구라고 부르지 못했던 나는 웃으면서 이건 장거리 연애 같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라고 물었고 그는 당연하죠, 라고 말하고는 내 답을 기다렸다. 지난 번에 맛보았던 파인애플 과자를 사다줄 수 있어요?, 응 그래요. 또 뭐없어요? 아 그리고 그때 보여준 벽장식 붙이 있잖아요, 나 그거 하나 사고 싶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응 그래요 라고 답한 그는 갑자기 웃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좀 해석하기가 어려워 눈에 질문을 담고 그를 쳐다보았더니, 아. 사실은 그걸 당신 생일 선물로 살려고 했어요. 고양이 있는 거 그거 좋아하죠 ? 잘 되었네, 우리 같이 골라요. 


고양이 있는 거 하나만 생각한 나에게, 하나 더 고르라고 하던 그, 좀 있다가, 선물이 방에도 하나, 키 재는 걸로 하나 골라요 라고 하던 그. 막상 받고 나서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handy 하다라고 불릴만한 사람인 나는, 이거 나 혼자 못해요 라고 말했고,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응 같이 해요, 라고 답했다. 어디다 할 지 생각했어요? 난 고양이는 여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하면서 그가 가르킨 부분은 사실 내가 생각한 적이 없는 공간인데, 생각해보니 정말 가로등의 들어갈 장소이다. 아이가 없는 날, 가로등과 고양이를 붙여 놓으니 겨우 하나 했는데 집이 많이 달라 보인다. 아이는 집에 돌아와서 엄마 우리 집에 이제 고양이가 있네 라고 좋아했고, 나는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예쁘다고 하는 친구들 답장 중에 어디서 샀니? 라는 물음. 어린아이가 자랑하듯, 이거 타이완에서 산거야 했더니, 음,, 스웨덴에서 살 수 있을 거야. 사실이다. 인터넷으로 스웨덴 사이트에도 있다. 나는 어떤 물건이 꼭 어느 지역에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면, 이 어찌나 80년 대의 생각인가, 하며 웃게 된다다. 순간, 살짝 실망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다시 벽을 바라보니, 나의 기쁨의 본질은 이 물건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데 있는 게 아닌 걸 깨닫는다.  생일이 아직도 많이 남았던 그때, 그가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하고, 그걸 살 계획을 하고, 그와 함께 고르고, 붙이고, 그 순간들에 있었음을. 누가 말한 것 처럼 이 선물은 영원히 남아 있을 물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영원히 남아 있는 물건은 무엇이고, 우리가 진정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물건인가? 변하지 않는 그 순간의 의미인가? 


이제는 하나의 일상이 된 그와 함께 먹는 화요일 저녁, 밥을 먹고 나면 아이랑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랫동안 기다린 아이와 함께 보드게임을 한다. 아이와 그가 주사위 던지는 동안 나는 벽에 있는 가로등과 고양이를 마치 평온한 풍경을 보듯이 본다. 내 시선을 따라가던 그는, 우리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한다. 내가 소리내어 웃으면서, 우리가 잘한게 아니라 당신이 잘한거죠. 난 거의 한거 없어요, 저기 작은 새들만 붙였는데, 말하는데 그가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가 잘 한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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