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9 14:58
어제까지 읽기로 계획했던 책 4권 중에 <바덴바덴에서의 여름>과 <삶의 한가운데>를 다 읽었고
<말테의 수기>는 반쯤 읽다가 윔블던 테니스에서 로저 페더러의 두 번의 5세트 경기로 정신이 흐려지면서
읽었던 내용을 다 잊어버리는 바람에 (원래 읽으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기도 했고 ^^)
책 읽을 의욕이 땅에 떨어졌다가 어제 페더러의 패배로 다시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a모 듀게분이 추천하신
<황야의 이리>를 읽기 시작했어요. (제가 읽은 건 김누리 역, 민음사)
좀 전에 다 읽었는데 음... 다시 세계문학을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용솟음치네요. ^^
사실 <인생의 베일>을 제치고 <황야의 이리>를 먼저 읽은 건 헤세의 소설이 더 읽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말테의 수기>가 초반에는 아주 멋진 문장들로 제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뒤로 갈수록 제 집중력이 약해지면서
(세 권째 읽다보니 게으른 저는 벌써 조금 지쳤는데 비가 그치고 더위가 시작된 데다 윔블던 경기까지 겹치니)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슬슬 사라지고 있었거든요.
몇 년 전에 어쩌다 읽은 <크눌프>를 비롯해 제 기억에 헤세의 소설들은 헐렁헐렁하고 휙휙 읽혔던 것 같았어요.
그런데 <황야의 이리>는 동화책같이 쉬워 보이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문장들의 밀도가 높아서 그렇게 헐렁한 소설은 아니었어요.
사실 저에게 헤세의 소설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나 사상서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등장인물들이 실재한다기보다는
작가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장치 같았거든요. 주인공들이 다들 무슨 순례자나 구도자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사실 <데미안>이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같은 소설은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도 잘 안 나지만...)
<황야의 이리>도 읽다보면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 같고 등장인물도 실재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분신들 같은 느낌이에요.
그런데 이제까지 제가 읽었던 헤세의 소설 중에 가장 탐미적이고 관능적인 문장들로 쓰인 소설 같아요.
책을 읽다가 번역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는 소설이었어요. 원문 자체도 그랬겠지만 번역 문장이 참 멋지더군요.
언뜻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가 생각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설이었어요.
초반부터 재밌긴 했지만 이 소설에 대한 흥미를 확 끌어올린 건 59~93페이지에 나온 '황야의 이리론'이었어요.
스스로를 인간과 이리로 분열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이원화라고 비판하며 오히려 인간은 영혼의 복합성을
고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은 아주 흥미로웠어요. 인간에 대한 통찰력도 보여주고요.
120페이지부터 헤르미네라는 지적이고 매력적인 소녀가 나타나면서 또 재밌어지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저의 본능적인 직감에 따르면 이 소설이 헤세의 최고작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저는 헤세의 소설을 몇 권밖에 안 읽었지만... ^^)
만약 제 주위에 분열된 자아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20대의 청춘이 있다면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에요.
4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 세상만사가 시들하고 건조해진 중년들에게도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책인 것 같고요.
<황야의 이리>를 재밌게 읽고 나니 미적지근했거나 소화하지 못했던 세계문학 소설들에 대해서는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역시 고전은 일당백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면서 다른 듀게분들이 추천해 주신 <멋진 신세계>와 <영혼의 집 1, 2>를
계속해서 이번 주에 읽기로 했어요. (<영혼의 집>은 길어서 뒤로 밀렸음 ^^)
<황야의 이리>를 읽고 나니 제가 짐작으로 대충 고른 소설들보다 다른 듀게분들이 다 읽으신 후 추천해 주신 소설들이
의외로 더 제 취향인 것 같기도 하네요. ^^
저는 장기계획 같은 건 안 세우는 사람이고 계획의 반만 달성해도 무척 기뻐하는 사람이라 오늘도 역시 이번 한 주 동안 읽을 것만
정했는데 만약 다른 듀게분들이 세계문학 쪽의 소설을 추천해주시면 그걸로 다음 주에 읽을 계획을 세워볼까 해요.
혹시 후배나 친구에게 꼭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혹은 속할 만한) 소설을 알고 계시면 저에게 강요해 주세요. ^^
2016.07.09 15:10
2016.07.09 15:18
사실 저는 <데미안>을 읽고도 좀 무덤덤했고, 이성과 감정의 분열로 괴로워하던 시절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재밌게 읽긴 했지만 헤세를 훌륭한 '소설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념적인 구도자 같았죠. ^^) 그의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황야의 이리>는 책의 소개에 있는 것 만큼이나 상당히 대담한 내용의 소설이더군요.
명상하는 소설을 쓸 것 같은 헤세가 이렇게 강렬한 소설을 썼나 하고 좀 놀랐어요.
소설의 뒷부분 250페이지 정도부터는 좀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이긴 했지만...
2016.07.09 17:08
2016.07.09 17:39
처음에는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읽었고 다음엔 민음사에서 나온
<지하로부터의 수기>로 읽었는데 문예출판사 책은 뭔가 좀 더 비극적인 느낌으로 쩌릿쩌릿
전율을 느끼며 읽었고 민음사 책은 가슴 아프면서도 약간 웃긴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으로
재밌게 읽었던 것 같아요. 제가 두 번 읽은 유일한 소설이에요. ^^
2016.07.09 18:04
2016.07.09 18:31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소설 무척 좋아합니다. ^^
곰브로비치의 <포그노그라피아>는 제목에 혹해 읽어볼까 했는데 인터넷 서점 리뷰를 보니
하나도 안 야하다고 해서 추천하신 <코스모스>부터 읽어볼까해요. ^^
철학적인 소설이라는 점도 저에겐 매력적이고요. 다음 주에 읽을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
2016.07.09 20:02
<멋진 신세계>(범OO)를 읽다가 좀 이상한 문장들이 나와서 어떤 번역본이 좋은가 검색해 보니
안정효 역 소담출판사 책이 제일 낫다고 해서 동네 도서관에서 찾아봤는데 다 빌려갔네요. ㅠㅠ
열흘 후 반납 예정으로 되어 있어서 일단 예약해 놓고 <영혼의 집>을 먼저 읽기로 했어요.
(어떤 번역본이 좋은지 먼저 검색하고 빌렸어야 했는데...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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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10시에는 일단 윔블던 테니스 여자 결승을 보고 ^^ 안젤리크 커버라는 선수 멋있네요.
호주 오픈에 이어 다시 한번 세레나 윌리엄스를 무찌를 수 있을 것인지... 둥둥둥
2016.07.10 08:00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내용전개에 영원히 잊지 못할 산세베리나 공작부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도 문장이 괜찮습니다.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전망 좋은 방>
제인오스틴의<오만과 편견>,<이성과 감성> 도 추천드려요.
2016.07.10 10:48
추천해 주신 책들 몽땅 다 제가 안 읽은 것들이어서 도대체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
아무래도 청소년 권장도서부터 읽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오만과 편견>을 읽기로 했습니다. ^^
<파르마의 수도원>도 제목을 기억해 둘게요.
2016.07.11 12:32
<영혼의 집 1>을 다 읽었어요. 마술적 사실주의에다 3대에 걸친 이야기라고 해서 과연 재미있을까
살짝 의심을 품었었는데 반성합니다. ^^ 아주 재밌는 소설이네요. 김영하의 <검은 꽃>도 언뜻 생각나고요.
가능하면 오늘 밤까지 <영혼의 집 2>를 다 읽고 내일은 <멋진 신세계>(이덕형 역, 문예출판사)를
읽어볼까 해요. 이 번역도 읽을 만한 것 같아서... <코스모스>는 어제 빌려놓았고 <오만과 편견>은
읽고 싶은 역자의 책으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멋진 신세계>를 빨리 읽을 수 있으면 반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굴레에서 1, 2>를
이번 주말까지 읽고 다음 주에 추천해 주신 <코스모스>와 <오만과 편견>을 시작할까 해요. ^^
2016.07.11 19:52
2016.07.18 01:10
좋은 번역으로 읽으셨군요. ^^ <멋진 신세계> 다 읽고 나서 댓글 달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많이 늦어졌어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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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때는 헤세의 책이 성인이 되기전 필독서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중3 졸업 무렵에는 <나르치스->에 아주 빠져있었지요